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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개인주의 사회에 대한 경고: 주체 없는 주체
초개인주의 사회에 대한 경고:
주체 없는 주체
최근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초개인주의(Hyper-individualism)’다. 디지털 플랫폼의 발달과 파편화된 환경은 개인을 조직과 공동체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킨 듯 보인다. 그러나 이 화려한 자유의 이면에는 주체의 상실이라는 심각한 철학적 빈곤이 숨어 있다. 특히 인공지능이 대리인을 넘어 인간 주체성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주체에 대한 철학의 부재는 쉽게 이들에게 주체성을 넘겨주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디지털이 추동하는 초개인주의 시대의 이면에는 엄청난 암운이 서려 있다. ‘주체(Subject) 없는 주체’라는 탈인격화된(Depersonalized) 주체가 주체로 활동하며 생긴 암운이다. 주체 없는 주체라는 시대적 암운에 시달리게 된 이유는 주체라는 단어 속에 담긴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중의적 의미 때문이다.
주체(Subject)라는 단어가 가진 역설:
주체의 첫 번째 의미는 종속됨으로써 완성되는 나라는 뜻을 품고 있다. 영어 단어 ‘Subject to’는 그 자체로 거대한 역설을 품고 있다. 라틴어 Subjectum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아래로(sub) 던져진(ject)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주체는 왕이나 법 아래에 놓인 ‘신민(종속)’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체가 가진 다른 의미는 다른 하나는 문장을 이끌어가고 문장의 핵심이자 판단의 근거가 되는 ‘주어(주체)’를 의미한다. 행동을 이끄는 능동적 주체라는 의미다. 주체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두번째 주체만을 주체로 보는 편견 때문이다. 온전한 주체는 첫번째 주체인 Subject to가 두번째 주체 Subject for와 결합해 탄생한다.
첫번째 주체에 근거하지만 주체의 수동성을 주체의 능동성과 결합시킨 철학자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다. 칸트에게 진정한 주체란 단순히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본능이나 외부의 유혹이 아닌, 내면의 ‘양심의 명령(정언명령)’에 스스로를 종속(Subject to)시킨 주체를 근거로 자율성을 얻을 때 비로소 온전한 도덕적 주체가 된다고 보았다. 내가 세운 양심이라는 도덕적 법칙에 복종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자율성을 드러낼 수 있을 칸트의 실천이성의 주체가 완성된다.
윤정구와 동료들(Lawler, Thye)는 책(Social Commitment in a Depersonalized World)에서 현대사회는 성격 상 칸트가 제시한 주체의 자율성을 지키기 어려운 구조로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복잡해지는 세상의 다양한 기대는 다양한 역할을 요구하고 이런 역할 기대에 따라 살다보면 인간은 다양한 페르소나가 생성되지만 이들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해 탈인격화(Depersonalized)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주체성을 상실한다.
‘Depersonalized’란 단순히 주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수많은 디지털 환경과 사회적 역할 속에서 수천 개의 페르소나로 분절되어, 정작 자신의 내면적 일체성(Unity)과 정직성(Integrity)을 간직한 주체가 상실된 상태를 의미한다. 윤정구와 동료들은 이런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것인지에서 Subject to를 찾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고유한 주체로 subject for 로 나서 협업할 때 온전한 주체성이 달성된다고 주장한다.
윤정구와 동료들은 자신의 뿌리인 공동체와 분리된 채 파편화된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개인은, 칸트가 말한 양심의 명령을 들을 ‘중심’조차 잃어버린 주체(헌신을 잃어버린 주체)가 된다. 이들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고립된 원자에 불과하다. 이들은 극심한 아노미에 빠져 살다 어느 순간 아노미 자살의 유혹에 시달린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두 번째 주체는 미래를 향해서 스스로 일어서는 근력을 가진 주체 즉 Subject for의 주체다. 이런 능동적 주체는 분절된 페르소나를 다시 하나로 묶어내는 힘을 가진 존재다. 에밀 뒤르켐의 공동체의 가치를 내재화한 개인들로 표출하는 독창성을 강조하는 ‘도덕적 개인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적 헌신(Social Commitment)과 만난다.
윤정구 교수와 동료들이 주장하듯, 인간은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에 헌신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파편화된 자아를 하나의 일체성(Unity)으로 통합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공동체의 북극성에 자신을 정렬시키는 주체가 될 때 다른 사람과 비교를 넘어서는 자신의 독창성이 구현되어 분절된 페르소나들이 하나의 ‘진실한 나(Authentic Self)’로 수렴되는 온전한 자아를 체험한다.
초개인주의 사회가 경고하는 ‘주체 없는 주체’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은 명확하다. 나를 구속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이 자유라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진정한 주체는 내가 기꺼이 ‘종속’될 고결한 공동체를 위한 지속가능성 가치를 발견할 때 시작되고 여기에 기여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존재목적을 가지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때 완성된다. 탈인격화된 세계의 유혹에 맞서 내면의 일체성을 지키고, 공동체의 가치에 헌신하는 ‘도덕적 개인주의’를 실천할 때, 우리는 비로소 파편화된 개인이 아닌, 스스로 일어서는 강인한 근력을 가진 진짜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진성인(Authentic Character)이 되거나 진성리더(Authentic Leader)가 된다는 것은 나를 억압하는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스스로를 정렬(Align)시키는 용기 있는 선택이다.
다음은 이런 온전한 주체성을 복원하기 위한 질문들이다:
당신은 진짜 주체(Subject)로 살고 있습니까?”
나는 현재 수많은 사회적 페르소나 속에서 파편화되어 있지는 않나요? 나의 말과 행동을 하나로 꿰뚫는 ‘내면의 온전성(Integrity)’이 있습니까?
나는 나만의 이익을 넘어, 나의 자유를 기꺼이 투신할 만큼 가치 있는 ‘공동체적 북극성’을 발견했습니까?
초개인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는 칸트의 ‘양심’처럼 타협할 수 없는 나만의 도덕적 기준이나 가치를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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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기독교에서의 조직신학과 윤리신학의 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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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주체철학도 조직신학과 기독교 윤리학 사이에 심각한 분절(Decoupled)이 있다.
조직신학은 주체철학의 입장에서 ‘Subject to’의 수동성 (날줄 – 세로선)에 초점을 둔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와 주권, 그리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서를 연구한다. 조직신학은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 아래 있는 존재로서, 그분의 뜻에 어떻게 ‘Subject to’ (종속/순응) 하는지의 문제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입장에서는 이는 수동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신학적으로는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는 ‘거룩한 의존성’을 의미한다.
조직신학은 천에서 날줄이 고정되어야 옷감이 형태를 유지하듯,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종속되는 이 수동적 토대가 인간 삶의 근본적인 방향성을 잡아주는 역할이다.
조직신학의 중요성에 밀려 신학에서 놓치는 부분이 기독교 윤리철학이다. 윤리학은 ‘Subject for’의 능동성 (씨줄 – 가로선)의 문제를 다룬다. 신앙을 가진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 것인가를 다룬다. 하나님이 주신 밀알을 내 삶속에서 어떻게 키워 나갈 것인가의 문제다. 여기서 인간은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수동적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Subject for’ (대상을 향한 주체)의 창조 사역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다. 기독교인으로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신앙적 원리를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 능동적으로 엮어내는 실천적 힘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윤리철학은 주체의 씨줄의 역할을 담당한다. 날줄(신학적 토대) 사이를 씨줄(윤리적 실천)이 바쁘게 오가며 면을 만들어내듯, 인간의 능동적인 결단과 행동이 신앙의 내용을 구체적인 삶의 주체적 무늬로 완성한다.
“기독교인의 주체성은 씨줄만 가진 사람도 아니고 날줄만 가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온전한 주체성은 하나님에 대한 수동성과 창조의 대리인으로의 윤리적 능동성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자신만의 고유한 태피스트리를 짜나가는 과정에 담겨있다.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Subject to)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세상 속에서는 그분의 뜻을 펼치기 위해 가장 강력한 주체적 능동성(Subject for)을 발휘하는 것이 온전한 주체성이지만 대부분은 순종에 머무른 상태에 그쳐 기독교인의 온전한 능동작 주체성을 구현하지 못핫다.
조직신학적 ‘수동성’이 존재의 근거(날줄)가 되고, 윤리학적 ‘능동성’이 삶의 실천(씨줄)이 되어 하나의 온전한 신앙적 삶이라는 직물을 짜는 사람만 온전한 기독교인의 주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