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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을 물려주는 아름다운 방식 은퇴의 의미
왕관을 물려주는 아름다운 방식
은퇴의 의미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의 차가운 설원 위에서, 우리는 단순한 승패를 넘어선 챔피온의 품격을 목격했다. 스노보드 하프파이프의 살아있는 전설 클로이 킴(Chloe Kim)과 그 뒤를 잇는 무서운 신예 최가온, 이 두 사람이 보여준 드라마는 스포츠가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이었다.
한국을 대표한 최가온에게 한국인 이민자로 미국을 대표한 클로이 킴은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인류가 세운 공동의 최고치를 향해 같이 달리던 스파링 파트너였다. 둘 다 어려서 스노보드를 시작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언니 동생으로 교류해온 것으로 보인다. 최가온의 현 나이는 17세이고 클로이 킴은 25살로 8살 차이다. 클로이 킴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우승자이고, 최가온은 올 밀라노 올림픽 우승자로 둘 다 17세 우승이라는 최연소 챔피언의 기록을 가졌다.
클로이 킴이 최가온을 부를 때 “My Baby”라고 애칭하는 것을 보면 평소 최가온도 클로이 킴을 완벽한 롤모델이자 나침반으로 고백하고 교감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최가온은 클로이 킴의 삶이 탄생시킨 클로이 킴 키드다.
결선 1차 시기, 예상치 못한 거친 추락으로 최가온이 무릎 통증과 심리적 압박에 눈물을 쏟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은 코치도, 가족도 아닌 바로 클로이 킴이었다. 자신의 경기 순서를 앞두고도 그녀는 후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너는 이미 세계 최고의 카리스마를 가진 보더(Badass)야. 방금 실수는 네 실력을 가릴 수 없어. 넌 충분히 다시 해낼 수 있어(You got this).”
이 한마디는 부상이라는 공포에 휩싸였던 어린 천재를 다시 일으켜 다시 투혼을 다지게 하는 결정적인 심리적 지지대가 된다.
자신의 올림픽 3연패라는 대기록이 달린 순간에도 클로이 킴은 후배의 성장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최가온이 3차 시기에서 부상을 딛고 완벽한 공중 회전을 선보이며 금메달을 확정 짓는 순간, 삼 연패 금메달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던 클로이 킴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환호하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포착된다.
1위 자리를 내준 직후, 그녀는 자신 메달 색깔이 바뀐 것을 아쉬움 대신 환한 미소로 최가온을 꽉 껴안으며 “나의 아기(My baby)가 해냈다”라고 외친다. 자신이 영원히 금메달을 딸 수 없으므로 챔피언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금메달을 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닮은 선수가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맨토해주고 후원해주고 코치해 자신의 챔피온십을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는 승계(Succession)에 있다.
시상대 위에서 긴장한 최가온의 넥워머를 직접 정리해주며 카메라에 후배의 얼굴이 잘 나오도록 배려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챔피언의 왕관이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선언하는 세레모니였다.
클로이 김은 이번 대회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침표를 찍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클로이의 은퇴는 ‘떠남’이 아닌 자신의 바통을 온전하게 물려준 승계였고 또 다른 자신의 부활이었다. 8년 전 자신이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 모습 그대로, 이제는 더 단단해진 후배 최가온에게 자신의 챔피온십과 메달의 바통을 완벽하게 넘겨주었다.
“스노보드의 미래는 가온이 덕분에 든든합니다.”
“저는 이제 가장 행복한 팬으로 남을 거예요.”
클로이 킴은 자신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슬퍼하기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종목의 미래가 밝음을 기뻐하며 떠나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겼다. 클로이 김이 남긴 것은 금메달 개수보다 더 찬란한 ‘챔피언의 품격’이었다. 품격 있는 은퇴를 계기로 클로이 킴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로운 삶의 기회를 다시 얻었다.
진정한 은퇴란 자신이 단순히 자신이 자리에서 내려오거나 아니면 할 수 없이 끌려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은퇴는 자신의 철학과 정신을 이을 수 있는 후배에게 바통을 떨어트리지 않고 온전하게 넘겨주고 넘어지지 않고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클로이 킴은 온전한 은퇴에 대해 큰 가르침을 주었다.
밀라노 올림픽에서 인간이 보여준 감동적 사례는 로봇과 인공지능이 표준이 되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디에서 존재우위를 구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가르침을 준다.
아마도 미래에는 피지컬 로봇이 최가온이나 클로이 킴보다 더 완벽한 곡예로 더 높은 평점을 얻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 로봇이 아무리 높은 기술점수를 얻어도 인간이 만들고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감동적 서사를 만들 수는 없다. 물론 로봇도 감동을 느끼는 흉내는 낼 수 있는지 모르지만 고통을 직접 직면하고 이겨내야 감동을 체험할 수 있는 인간을 흉내 내지는 못한다. 아무리 뛰어난 로봇도 인간이 느끼는 짜릿한 감동적 서사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주체적인 행동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한다.
이런 생각과 함께 든 생각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기질 속에는 악조건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재우위를 구현하려는 홍익인간의 피가 면면히 흐른다는 점이다. 설사 이민으로 성이 김에서 킴으로 바뀌었어도 K 컬처 속에 면면히 녹아 흐르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기질, 끈기, 정신이 지금과 같이 신자유주의 경쟁에 찌든 시대에 아름다운 은퇴와 승계의 감동적 서사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중간선거가 끝나면 은퇴할 것으로 보이는 트럼프가 이 둘 사이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은퇴 준비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작이 아무리 화려했어도 자신의 유산이 될 바통을 제대로 넘겨 주고 떠나는 은퇴가 지금까지의 삶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 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