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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을 어떻게 길들일까? 캔타우로스의 기수
인공지능을 어떻게 길들일까?
캔타우로스의 기수
신화 속 캔타우로스는 말의 강인한 하체와 인간의 상체를 동시에 지닌 반인반수의 존재다. 현대의 인공지능(AI)은 이 캔타우로스의 디지털 환생이다. 거대한 데이터와 연산 능력을 동력 삼아 달리는 말의 피지컬에, 인간이 던진 수만 가지 질문과 답변을 학습한 머리가 결합해 만들어졌다.
유사인간의 머리를 가진 캔타우로스로 변신한 인공지능이라는 말을 조련하는데 주목해야 할 역설이 있다. 이 캔타우로스의 머리는 인류가 당면한 시급한 과제, 즉 단기적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자본의 언어로 훈련되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캔타우로스는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지 않고, 최적화된 수단의 효율이라는 단 하나의 단기적 목표를 향해 무섭게 질주하는 고집스러운 말이라는 점이다.
고집스러운 캔타우로스에 올라탄 기수는 두 부류다. 하나는 기술의 속도에 압도되어 말의 등 위에서 휘둘리는 기수다. 이들은 매일 발전하는 인공지능에 찬사를 보내며 말을 더욱 단기적 효율성에 최적화 되도록 조련하는 기수다. 또 다른 부류는 말의 단기적 효율성과 생산성을 향해 폭주하는 말의 기세를 제어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말을 몰 수 있는 기수들이다.
이 두 기수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쟁우위’와 ‘존재우위’의 차이를 이해해야한다. 반복적이고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여 최적의 효율을 뽑아내는 ‘경쟁우위’의 영역은 이미 캔타우로스의 몫이다. 인간이 이 영역에서 AI와 속도 경쟁을 벌이는 것은 패배가 예정된 무모한 짓이다. 인간의 역할은 캔타우로스가 가야 할 근본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그 질주가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고삐를 쥐는 ‘존재우위’의 근력을 증명하는 데 있다. 경쟁우위와 존재우위는 이념형적 구성물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경쟁우위만 추구하는 기수도 존재우위만을 추구하는 기수의 운명은 모두 낙마할 운명이다. 경쟁우위를 추구하는 기수는 말의 속도를 제어하지 못해 낙마하고 존재우위만을 추구하는 기수는 말의 방향을 제어하는 과정에서 낙마한다. 낙마하지 않는 기수는 경쟁우위를 날줄로 존재우위를 씨줄로 결합한 자신만의 고유한 태피스트리를 만들어 말 안장으로 쓰고 있는 기수다.
<공지능 (Co-Intelligence)>라는 책을 출간한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의 에단 몰릭(Ethan Mollick) 교수도 제대로 된 기수에 대해 본인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몰릭이 제시한 ‘들쭉날쭉한 개척지(Jagged Frontier)’ 개념은 기수가 왜 깨어 있는 인간이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AI의 능력은 매끄러운 평면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는 신적인 능력을 보이다가도 아주 기초적인 논리에서 처참하게 무너지는 들쭉날쭉한 경계선을 갖는다. 이 경계면의 불확실성 때문에 인간은 인공지능을 사용할 때 반드시 ‘인간 중심의 루프(Human in the Loop)’ 안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 기수가 말의 상태를 살피지 않고 질주에만 몸을 맡긴다면, 황야의 삐죽한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스스로 존재우위의 근력을 기르지 못한 채 요행히 말의 등에 올라타고 속도와 효율성이라는 경쟁우위를 찬양하는 기수들은 머지않아 낙마할 운명이다. 캔타우로스의 가속도는 인간의 생물학적 인지 능력을 이미 초월했다. 기수가 자신의 철학적 중심과 목적 의식이라는 근력을 갖추지 못하면, 말의 거친 반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튕겨 나가 낙마하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인공지능에 종속된 인간은 도구보다 못한 소모품일 뿐이다.
AI라는 캔타우로스의 몸체와 머리는 이미 완성되었으며 이 둘이 조합해 만든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캔터우로스가 달리는 황야는 몰릭이 지적하듯 여전히 들쭉날쭉해서 정신을 안 차린 기수는 반드시 낙마한다.
캔터우로스의 경쟁우의에 인간의 존재우위를 직조할 수 있는 진성리더십의 근력을 갖춘 기수만이 ‘인간 중심의 루프’를 유지하며 AI와 정상적으로 협업할 수 있다. 경쟁우위에 존재우위를 직조해 자신만의 태피스트리를 안장으로 가진 기수만 기술의 경쟁우위를 넘어선 인간의 존재우위를 만끽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말을 넘어 그 말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우위라는 정체성 근력이다. 이런 존재우위 근력은 하루 아침에 길들일 수 있는 근력이 아니다. 말에서 떨어진 후 이런 근력에 대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후약방문이자 지나간 버스에 손을 드는 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