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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삶의 에너지로 만드는 삼 단계 전략 투사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고통을 삶의 에너지로 만드는 삼 단계 전략
투사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인간은 빛에 비춰진 자신의 밝은 모습만을 편애하며, 그 빛이 강해질수록 필연적으로 짙어지는 어두운 그림자인 고통은 더욱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외면한다. 우리는 자아의 밝고 유능한 면만을 ‘나’라고 규정하고, 그 규정에서 벗어난 수치심, 분노, 열등감과 같은 그림자는 자신의 것이 아닌 듯 거적을 덮어 감춘다. 상처가 두려워 거적을 덮어 놓는다고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무서워 거적을 덮어 논 상처에는 구더기가 생기고 고통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치유되지 못한 고통은 의식의 뒤편에서 ‘귀신’이 되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이를 감내할 힘이 부족할 때 우리는 이 고통을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가진 타인에게 던져버리는 투사를 일삼는다. 거적을 덮어서 구더기가 생긴 자기 고통은 반드시 죄 없는 남들에게 투사된다.
자기 고통을 외재화 시켜 남을 괴롭히는 투사는 명백히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비윤리적 행위임에도 물리적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윤리성의 심각성조차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상습화된다. 투사는 윤리의 울타리를 넘어 자행되는 심각한 심리적 폭력이다.
투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칼로 잘라내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생각과는 달리 자신의 고통을 잘라내 타인에게 던져버린다고 해서 자신의 고통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인에게 투사된 고통은 관계라는 거울을 통해 되돌아와 나의 환부에 소금을 뿌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투사된 고통은 주변의 모든 소중한 관계를 차례 차례 파탄으로 몰아넣는다.
고통은 외과 의사가 환부를 수술로 도려내듯 제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고통은 그것을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존재의 일부로 인정할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며, 이 수용의 과정이 완료될 때 억압에 쓰이던 에너지는 비로소 생명력 있는 자유로운 에너지로 전환된다.
켄 윌버는 자신의 통합 이론인 ‘거대한 온전함(Big Wholeness)’에서 칼 융의 통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이 고통을 내재화하는 ‘그림자 내재화 전략’을 구체화했다.
윌버의 그림자(고통) 내재화 전략은 오랫동안 고통을 덮어두었던 거적을 들추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윌버는 거적 아래 숨겨진 고통을 직면하고 이를 다시 자신의 일부로 가져오는 과정을 3인칭, 2인칭, 1인칭의 단계적 전략으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부하 직원의 ‘무책임함’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리더가 있다고 가정하자. 사실 자신의 무책임함이 부하에게 투사된 것이다. 3인칭 단계에서 리더는 그 분노의 대상을 객관화하여 “저 직원은 정말 무책임한 사람이다”라고 명확히 규정하며 자신의 감정을 분리해 관찰한다(Face It). 삼인칭 단계에서는 그림자에 무책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삼인칭으로 객관화 시켜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과제다. 다음 2인칭 단계에서는 그 무책임함이라는 속성을 가상의 ‘너’로 설정하고 대화를 시도한다(Talk to It). 삼인칭 무책임을 이인칭 무책임으로 전환하는 상상적 실험이다. “(무책임한) 너는 왜 내 안에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물어본다. 너로 무책임을 설정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리더는 자신이 과거에 책임감이라는 굴레에 갇혀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이 ‘무책임’이라는 그림자로 억압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마지막 단계는 너로 받아들였던 무책임을 자신의 문제로 일인칭화 하는 단계다. 1인칭 단계에서 리더는 “사실 나에게도 무책임해지고 싶을 만큼 쉬고 싶은 욕구가 있다”며 그 에너지를 나의 일부로 온전히 받아들인다(Be It). 이때 비로소 타인을 향한 병적인 분노는 사라지고, 스스로를 돌보는 지혜로운 에너지가 회복된다.
결국 삶의 온전함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원인은 햇빛에 비춰진 자신의 강점에 대한 지나친 편애에 있다. 우리는 유전자 복권이나 긍정심리학이 찬양하는 ‘강점’만을 ‘진정한 나’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기만한다. 본인이 긍정심리학이나 강점코칭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이들은 그림자나 고통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강점이라는 칼은 또한 본인의 것인 약점을 잘라내는 칼로 작용한다.
인간의 근원적 에너지는 강점에서 생기지 않는다. 강점과 약점을 모두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강점을 플러스 극으로 약점을 마이너 극으로 설정해서 서로의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창조적 긴장이 만들어질 때 우리가 원하는 내재적 에너지가 생성된다.
핵심은 그림자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도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포함하는 용기가 온전한 자신을 치유하는 에너지를 만든다. 상처나 아픔은 외과적으로 수술해서 잘라낸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과 아픔은 이들도 내 자신이라고 받아들이고 품어주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에너지로 발산된다. 없는 사람 취급 받아 자신의 내면 어느 곳에 숨어서 울고 있는 성인아이를 자신으로 인정하고 이 아이의 고통을 치유하고 해결해 당당한 다윗으로 키워내는 과정이 온전한 자기 성장이다.
자신의 아픔을 외과 수술로 잘나내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조차도 자신의 일부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진성리더십에서는 자기 긍휼(Self-Compassion)이라고 부른다. 자기긍휼은 강점에 대한 편애를 극복하고, 그 강점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겨난 그림자조차 나라는 존재의 구성 요소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치유하는 과정이다.
자기긍휼은 잘난 모습만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상처받고 못난 자신도 자신으로 직면하고 인정하는 용기다. 대부분 유전자 복권으로 받은 강점이라는 편협한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그림자까지 껴안는 이 내재화의 과정이야말로 인간을 분열에서 구원하고 ‘거대한 온전함’으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자기긍휼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삶의 존재목적을 실현하는 자기규제의 근력을 만드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 삶의 안티프래질리티 근력은 고통을 자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넘어졌지만 일어서는 과정에서 생긴다. 진성리더가 된다는 것은 자신에게 덮친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해 목적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 근력을 만드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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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트럼프와 네탄야후 같은 과대망상증 소시오 패스가 생긴 이유도 이들이 자신에게 비춘 빛에 취해 자신의 고통을 품고 괴물로 자란 성인아이를 박절하게 잘나 내 남들에게 투사한 결과로 보인다. 인류문명을 파괴하는 전쟁의 고통을 죄의식 없이 타인에게 부과하는 만용도 결국은 이들이 습관처럼 행했던 투사의 단위가 맡은 직책으로 국가단위로 커진 것일 수 있다. 이런 리더가 나라를 이끈다는 것은 한 마디로 인류의 재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