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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호모사피언스 지위 상실 인공지능의 8가지 함정
인공지능과 호모사피언스 지위 상실
인공지능의 8가지 함정
어제(2026년 6월 2일)는 #진성리더십_학회(회장 #한영수)의 진성도반들의 독서클럽인 <#소크라테스_책읽기>에서 클럽의 리더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3장 <사유의 이미지>를 도반들과 같이 읽었다. 같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대부분 원전번역의 문제지만 번역이 아무리 난삽하고 조악해도 도반들과 같이 읽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진성도반들과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다시 읽어가며 들뢰즈가 마치 인공지능의 출현을 예측이라도 한 듯 인간사고 근력의 소실 문제를 경고한 통찰력에 놀랬다. 들뢰즈는 진성리더십에서 차이와 반복을 통해 존재목적을 향해 되어감(Becoming)이라는 안티프래질리티 근력을 조형하는데 학문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철학자다.
<차이와 반복>은 1968년 들뢰즈의 박사 학위 원고였다. 처음 출간된 해가 68 5월 혁명이 일어난 해이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이미 들뢰즈는 인간이 사고의 근력이 어떻게 소실되어 호모 사피엔스의 지위를 상실할 것임을 경고한 셈이다. 들뢰즈의 경고는 인공지능이라는 대리사고(Cognitive Offloading) 도구의 출현으로 현실이 되었다.
인공지능 전환(AX)의 가속화가 가져온 가장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재앙은 인간이 사유의 노동을 기계에 전적으로 떠넘기는 인지 작업의 외주화(Cognitive Offloading)에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번거로움을 면제받은 대가로 안락함을 얻었다고 믿지만, 그 이면에서는 인간을 ‘평균’이라는 거대한 독사(Doxa) 세계로 몰아넣는 정신적 안락사가 진행 중이다. 인공지능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근력이 어린이 근력으로 소실된 결과다.
들뢰즈는 인간이 독립적이고 비판적이고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근력을 소실하는 8가지 함정을 제시한다. 모두가 인간의 사고를 정해진 평균의 답으로 밀어 넣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질 들뢰즈가 경고했던 독단적 사유의 8가지 함정이 오늘날 인공지능이라는 강력한 대리사고의 기제와 공모해 인간의 사유 근력을 어떻게 어린이 사고근력으로 약화시키고 무력화하는지를 살펴보자.
첫째, 들뢰즈가 지적한 선의의 함정은 자신의 질문에 인공지능이 뱉어내는 답은 최소한 중립적이고 올바를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생긴다. 다른 사람들도 다 쓰고 있어도 문제가 있으면 기사로 나왔을텐데 지금까지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고 간간이 비치는 해악보다 좋은 점에 대한 찬양이 넘치기 때문에 생긴 믿음의 함정이다. 인공지능이 설마 나를 악으로 인도하지는 않을거야라는 안일한 믿음에 기대어 뇌를 쥐어짜는 고통 대신 챗봇의 매끄러운 문장에 안주하면서, 인간은 진리와 부딪혀 피를 흘리는 뽀쭉한 사유의 야성을 잃어버린다.
둘째, 상식의 함정은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상식이라는 이름이 붙은 평균적 취향의 지배 때문에 생긴다. 모두가 인공지능이 필터링해 준 가장 무난하고 보편적인 정보만을 공유하면서, 상식을 깨뜨리는 독창적인 감각은 배제되고 획일화된 집단적 상식의 늪에 빠진다. 인공지능이 제공한 답은 우리의 답을 만드는 초기값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답으로 신봉함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일인칭으로 사고할 수 있는 근력을 잃는다.
셋째, 재인(Recognition)의 함정은 사고가 과거 현상에 대한 이해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놓치는 함정이다. 인공지능은 과거에 누군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내놓은 답의 평균에 해당하는 답을 프롬프트 한 줄로 이미 아는 것처럼 복제할 수 있는 게으름을 정당화 한다. 이 게으름이 새로운 사건에 대해 탐구해 미래를 창의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사고의 근력을 소실시킨다. 인공지능이 출력한 기획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는 단지 과거의 기억을 사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여,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생성적 사유 근육을 조금씩 퇴화시킨다.
넷째, 재현(Representation)의 함정은 인간의 복잡다단한 생각을 인공지능의 토큰과 카테고리라는 한정된 축 안으로 박제한다. 분류 시스템에 잡히지 않는 날 것의 주는 의미와 차이에 대해 묻고 사유할 수 있는 언어적 상상력을 상실한다. 세상을 보는 정신모형이 모두 평균 정신모형으로 수렴하고 미래의 세계관 조차도 모두 똑 같은 판박이 세계관으로 수렴한다.
다섯째, 맞고 틀림을 통해서만 진리를 볼 수 있다는 믿음이 만든 함정이다. 인공지능이 짜놓은 프레임을 넘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답이 아니라 제시된 답이 기존의 합의한 답과 동일한지 혹은 유사한지를 중심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믿음이 문제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방해한다. 세상이 창조되는 것은 맞고 틀림의 틀을 넘어서 새로운 틀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에 달린 문제다. 맞고 틀림을 중심으로 짜여진 인공지능이 제시한 답을 오타 수정과 팩트 체크만 하느라 정작 잘못된 질문과 질문에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놓친다.
여섯째, 보이는 답만을 맹신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답을 놓치는 함정이다. 미래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사건과 의미는 눈에 보이기보다는 빙산의 밑동에 감춰져 있다. 이미 현실로 실현되어 눈에 보이는 답만을 정당성을 획득한 것으로 생각하는 미신이 사고근력을 소실하는 함정으로 이끌고 있다. 눈에 보이게 제도화 된 것만을 맹신하는 과정은 제도 밑에서 꿈틀거리는 의미와 사건을 볼 수 있는 눈을 맹인의 눈으로 만든다. 보이는 것만 믿고 인공지능의 블랙박스적 맹목성을 절대적 권위로 수용하게 만든다. 데이터가 그렇다는데 무슨 의심이 필요하냐며 기성 질서의 영토에 스스로 복종하게 만든다.
일곱째, 답에 대한 맹신은 질문에 대한 입을 봉쇄한다. 답에 더 가치를 두고 즉각적인 답을 만드는데 더 시간을 많이 쏟을 때 생기는 사고 근력은 대부분 손실을 경험한다. 새롭게 단서가 드러나는 사건과 의미에 대해 질문을 만드는 힘을 빼앗고 얄팍한 정답의 과대한 소유에만 집착하게 만든다. 남이 대신 정의해 준 문제 위에서 객관식 답안만 고르는 선택 대행업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마지막 함정은 아는 것을 배운 것이라고 착각하는 지행격차의 함정이다. 아는 지식은 자신의 일인칭 내러티브로 독해되고 학습을 통해 실행할 수 있는 근력을 확보했을 때 온전한 지식이 됨에도 그냥 시험에 만점을 맞으면 당연히 지식을 자신에게 체화된 지식이라고 믿는 함정이다. 낯선 텍스트와 부딪히며 내 주관이 깨지는 배움의 과정을 거세하고, 인공지능이 몇 줄로 요약해 준 지식의 화석만을 수집하게 만든다.
이 8가지 인간의 사고근력을 소실시키는 함정이 AX와 결합하면서 인간의 사유는 사유의 초깃값인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수준의 평균이라는 감옥에 갇힌다.
이러한 평균의 함정과 음모에 대한 경고는 시대를 뛰어넘어 다양한 학자들의 목소리로 변주되어 왔다. 토드 로즈(Tod Rose)는 그의 저작 <평균의 종말(The End of Average)>을 통해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평균적 인간을 표준으로 삼아 설계된 시스템이 어떻게 실제 인간의 들쭉날쭉한 재능과 개성을 말살하는지 폭로했다. 평균이라는 획일적 지층이 인간을 노예화하는 방식을 교육과 심리학의 언어로 고발한 것이다. 샘 새비지(Sam L Savage) 역시 저서 <평균의 함정(The Flaw of Averages)>에서 통계학적 관점에서 평균을 바탕으로 세운 계획은 평균적으로 실패한다고 조언한다. 단 하나의 숫자가 가진 맹목성에 속아 요동치는 불확실성과 내재된 위험을 직시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강력하게 경고했다. 이들은 모두 기성 체제가 효율성의 이름으로 구축해 놓은 상식과 평균주의라는 철장이 인간의 실존과 가능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분석한다.
호모 사피언스로 사고의 근력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들뢰즈의 경고를 극복해야 한다.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실존적 우위를 잃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유의 근력을 어린아이의 연약한 수준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지독하게 보수적인 인공지능의 편리함을 의도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당면한 문제를 정면으로 용기 있게 직시하고, 상식과 통념이라는 이름으로 그 위에 덮여 있던 거적을 용기 있게 들춰내 문제가 초래한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 이미 주어진 해결책의 언저리를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가장 깊숙한 원인의 수준에서 문제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이 가공해 둔 평균치의 데이터가 아닌 자신의 고유한 맥락에 맞는 구체적인 기호들을 자신의 온몸으로 수집하고, 기존의 문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만의 언어와 개념으로 답을 도출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것만이 이 비극을 멈추는 유일한 열쇠다. 들뢰즈는 기존의 개념으로 세상을 설명하고 이 세상대로 사는 것을 넘어서 기존 개념에 덮어놓은 사건들을 분출시키는 자신만의 개념과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 수 있을 때 사고의 온전한 근력을 확보한다고 제안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근력을 약화시키는 경고로 본인이 자주 인용하는 우화가 술꾼의 우화다.
술꾼이 늦은 밤 자신의 집 앞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다.
만취해서 정신이 혼미했던 술꾼은 본능적으로 자신 집 옆의 가로등으로 옮겨가서 자신의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묻는다. 무엇을 하시고 계시나요? 열쇠를 찾고 있습니다. 행인이 같이 찾는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자 행인이 다시 묻는다. 여기서 잃어버린 것 맞나요? 술꾼은 집 앞에서 잃어 버렸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왜 여기서 찾고 있나요? 술꾼은 여기가 밝아서 찾기 좋찮아요.
인공지능은 술꾼이 열쇠를 찾고 있는 밝은 장소일 뿐이다. 운 좋게 여기서 찾은 열쇠는 자신 집의 열쇠가 아니라 남의 집 열쇠이다.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마치 해결할 수 있다는 환각을 제공한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에도 편리함과 세련됨으로 포장한 밝은 가로수 등불에 반해 모두가 여기서 자신의 열쇠를 찾고 있다.
독립적, 비판적 창의적 사유 능력을 상실한 채 인공지능이라는 도구에 의존하는 인간은, 정작 자신의 집 앞에서 열쇠를 잃어버려 놓고선 단지 불빛이 밝다는 이유만으로 집과 멀리 떨어진 가로등 밑을 헤매며 열쇠를 찾는 술꾼의 무모하고 눈 먼 맹목성에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삶이 반복되어 지속되면 어느 날 자신의 사고의 모든 근력이 소실되었다는 것을 알고 행동을 취하려 하겠지만 반전을 기하기는 너무 늦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인간의 근력을 온전하게 훈련한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상징하는 캔터우로스 말을 타고 이미 멀리 달아났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