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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것들 긍휼감과 케노시스

Jul 4, 2026 ·6분 ·jkyoon · 2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것들
긍휼감과 케노시스
더글라스 존 홀(Douglas John Hall) 교수의 청년들과의 대담집 <Why Christian?: For Those on the Edge of Faith>이<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원전은 1998년에 나온 오래된 책이지만 캐나다에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보다 지금 대한민국 청년들의 신앙에 대한 직접적 답을 담고 있다는 생각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홀은 캐나다 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의 목사이자 북미를 대표하는 신학자로서, 맥길 대학교 오랫동안 가르쳤고 지금은 명예교수다. 책은 오랫동안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모태 신앙으로 교회에 다니다 교회에 환멸을 느껴 더 이상 교회를 가지 않는 학생들이나 교회 자체를 다닌 적이 없지만 역사적 예수와 신앙적 예수와의 괴리로 교회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가진 청년들이 교회에 던지는 질문에 대한 응답 형식이다. 질문은 맥길 대학에서 오랫동안 청년을 가르치며 받았던 질문들 중 많이 받은 것을 중심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모태 신앙 청년들이나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요즈음의 대한민국의 청년들도 당연히 던지고 있는 질문들이다. 질문은 크게 다음 네 개로 구성된다.
질문 1. “교회는 왜 이렇게 위선적이고, 세상 성공에만 집착하나요?”
청년들의 의문:
“예수님은 낮아지라고 했는데, 오늘날 교회는 더 커지고 더 부유해지고 더 권력화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른 위선자들의 집단처럼 보입니다.”
홀의 답변:
“비판 타당하다. 여러분이 목격하고 있는 기독교는 ‘유사 기독교’다.” 과거 기독교가 세상의 권력을 쥐었던 시대(Christendom)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해 교회가 지금처럼 병들었다. 기독교는 세상에서 승리하고 번영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낮아지고 비워내는 비움(Kenosis)의 신앙이었다.
질문 2. “고통이 가득한 세상인데,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나요?”
청년들의 의문:
“무고한 사람들이 재난과 전쟁으로 고통받고 죽어갑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사랑이 많으시다면 왜 이 비극을 그냥 지켜만 보고 계시는 건가요?”
홀의 답변:
“하나님은 보좌 위에서 구경하시는 전지전능한 방관자라는 잘못된 해석이 만든 부메랑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분이다.” 마르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하늘 높은 곳에 앉아 고통을 멀리서 선택적으로 해결해 주는 전능한 독재자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도 인간의 가장 참혹한 고통의 현장인 ‘십자가’에 직접 매달려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나에게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는다면, “지독한 고통을 겪는 소외된 이들의 곁에 함께 아파하며 계신다”고 답한다. 지금도 고통 속에서 고통을 같이 감내해가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와 같이 행동하고 임재해 계신다. 고통에 함몰되어 하나님의 임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질문 3. “2천 년 전 유대인 예수가, 오늘날 첨단 시대를 사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청년들의 의문:
“성경 속 예수는 신화처럼 느껴집니다. 동정녀 탄생이나 기적 같은 비과학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한 2천 년 전 예수가 지금 현대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홀의 답변:
“예수는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인간’의 완성이며, 참된 인간다움의 표준이다.” 교리가 박제해 버린 기적을 행하는 초자연적인 영웅으로서의 예수를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복음서가 보여주는 진짜 예수는 철저히 타인의 아픔을 자기 것처럼 여기며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로 살았던 인물이다. 과학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간성이 마모되고 고립되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예수는 “인간이란 어떻게 살아야 진정으로 행복하고 고귀해질 수 있는가?”의 되어감의 길을 온몸으로 보여준 대안이자 살아있는 이정표다. 결과 중심적으로 한 방에 모든 것을 해소하는 기적에 대한 역사적 실증적 포장이 예수를 고통 속에서 진통제를 처방하는 의사 정도로 격하시켰다. 예수의 기적은 제 삼 자가 아닌 아픈 우리가 스스로 주체적으로 일어서는 모습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질문 4.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 간다는 공식이 너무 독선적으로 느껴져요.”
청년들의 의문:
“타 종교나 비개인들을 정죄하고, 오직 ‘나의 사후 천국행 티켓’에만 집착하는 구원관은 너무 이기적이고 편협해 보입니다.”
홀의 답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개인의 보험이 아니라 ‘깨어진 관계의 회복’이다.” 한국을 비롯한 현대 교회가 구원을 ‘개인주의적 내세 보험’으로 전락시켰다. 성경이 약속하는 참된 구원은 사후 세계의 안전보장이 아니라,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시작되는 전인적인 회유다.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파괴된 자연 생태계와의 관계가 예수의 사랑 안에서 이 생에서 다시 연결되고 치유되는 우주적 화해가 현세에서의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대화의 핵심 결론
홀 교수가 청년들에게 설파하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고통의 십자가를 같이 지고 계시고, 고통의 문제를 공감하고 위로하는 수준을 넘어 치유를 위해 같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같이 감내해가며 같이 행동하시는 긍휼의 사랑을 가진 분이다. 긍휼로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이 일인칭으로 치유되었을 때 하나님이 전하시는 복음과 성령의 메시지가 분명하게 들리기 시작하는 케노시스(Kenosis)가 시작된다. 자신과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며 자신의 기복만의 위해 기독교를 마치 구원을 위한 복권처럼 팔아왔던 레거시 교회의 기복주의 신앙이 기독교의 토대를 무너트렸다.
기독교가 길을 잃고 헤매는 동안 교회는 경쟁과 승자를 우상시 하는 신자유주의에 교화 당했고 결국 긍휼과 케노시스의 하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레거시 교회의 박제된 교리와 율법을 넘어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절대순종의 교회 윤리를 제도화해 교인들을 관리했다. 기독교 신자를 아직도 윤리와 율법도 지키지 못하는 중세시대의 어린이로 취급해가며 절대순종을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절대복종으로 교묘하게 치환해 교회를 타락시켰다. 교회를 절대순종의 판옵티콘이라는 감옥으로 만들었다. 교회가 교인들을 절대순종의 판옵티콘에 가두어 윤리적 어린이 취급해가며 근본주의에 빠져 있는 동안 세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창조적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탈주했다.
기독교가 율법적 윤리에 갇혀 근본주의적 순종을 강요하는 동안 교회는 윤리를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선도할 수 있는 창조의 가치의 울타리를 세우지 못하고 고리타분해졌다. 하나님이 욥에게 당부했던 창조주의 아들로서 세상을 새롭게 선도하고 치유하고 창조하라는 가르침을 잊었다. 창조는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이 치유되어 제 발로 세워져 걸을 수 있을 때에 목격된다. 고대 유대 시대에는 대부분의 고통이 죄에서 오는 것을 인지했지만 죄와 고통의 내용이 시대에 따라 진화한다는 것을 해석해내지 못했다. 시대를 아프게하는 고통의 실제 실체를 이해할 수 있을 때 근본주의를 벗어나 십자가 고통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된 치유와 새로운 창조를 경험한다. 십자가의 고통을 오직 죄의 문제로만 소환하는 것은 근본주의자들의 교인들을 교회에 가두려는 숨겨진 의도다. 지금은 윤리를 어기는 것도 죄이지만 세상을 더 좋게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창조주 아들로서의 책무를 회피하고 율법의 울타리 속에서 남들처럼 편하게 사는 것이 더 큰 죄이다.
근본주의란 성경이 진리라는 말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여 모든 고통에 대한 치유를 성경구절을 있는 그대로 인용해서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성경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맥락적 의도보다는 성경구절 말 그자체를 진리의 증거로 논증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근본주의 감옥에 가둔 사람들이다. 성경구절 자체를 자신이 인증해야 할 진리의 증거로 인용하는 자들이 지금처럼 몰락하는 기독교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적 크리스챤들이다.
율법적 죄를 넘어서 부가된 시대적 책무를 완수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더 큰 의미의 죄가 가져오는 더 큰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토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씨앗으로 받아들여 삶 안에 가꾸고 치유해 스스로 일어서서 같이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때 기독교가 새롭게 써야 하는 창조의 기적도 연출된다. 기독교는 지금 시대의 교인에게는 상수로 전환된 율법(윤리)를 아직도 변수인 것처럼 팔아가며 교인들을 죄의 판옵티콘에 가두어 이들이 치유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치유하고 창조하고 생명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결론:
청년들이 느끼는 그 의심과 절망은 신앙을 해치는 적이 아니다. 오히려 청년들이 가진 의심과 절망은 지금의 박제된 교리를 깨부수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와 연대하시는 참된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진정한 신앙의 시작점이다. 믿음이 생명으로 살아 진리의 길을 만든다는 것은 믿음이 세상과 끊임 없이 공진화 하는 떨림을 만들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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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 Jeongkoo Yoon
About the author

Jeongkoo Yoon · 윤정구

Professor of Management at Ewha Womans University's School of Business. Writing on natural learning, double-loop reflection, and the sociology of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