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의 본질은 정체성이다
리더십의 본질은 진실한 정체성이다:
정체성은 한 마디로 자신이 과거에 어디에서 왔고 지금은 어디에 서있고 미래에는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 지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이다. 이 정체성에 대한 평가를 통해 사람들이나 기업이나 국가는 자신의 품격의 수준이 평가된다. 시대가 정체성을 잃고 헤메일수록 이들이 리더로서 가지는 시장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진실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구세주로 등장하기를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갈구하고 있다.
진실된 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잠재적 리더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첫째, 과거에 대한 시각의 재구성이다. 과거에 어디에서 왔는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과거의 문제 해결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미래의 삶이 어떻게 구성해야 제대로 된 삶을 마무리 할 수 있는지를 왜곡할 수 밖에 없다. 친일이라는 과거의 행적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해서 미래가 잘못된 방향으로 구성되어 온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바로 그 문제로 지금까지도 큰 홍역을 치루고 있다. 자신의 과거를 감추는 수준을 넘어서 왜곡하기까지 하는 일본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역대정권들도 자신 과거의 정통성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과거를 감추거나 왜곡하거나 심지어는 친일한 사람들을 찾아내서 훈장을 부여해왔다.
문제는 과거를 감추고 왜곡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허물이 과거를 감싸고 있다면 그것을 감추고 남들이 들춰낼 때까지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 문제이다.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미래를 과거의 문제를 해결한 성숙한 자신을 보여줄 수 있음에 대한 약속의 장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인간은 과거의 잘못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리더와 아닌 사람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숨기는지의 문제에서 갈린다.
다음은 미래 문제이다. 미래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서 있고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의 나의 삶의 스토리를 마무리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 삶의 초반에 아무리 괜찮은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삶의 종반부의 마무리를 잘못한다면 그 사람의 전체적 삶은 불행한 삶을 산 것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어린이들을 위한 우화적 스토리가 결국은 행복하게 삶을 살았다는 스토리로 마무리되는 이유이다. 자신의 삶의 마지막 종착지가 어떤 종착지였는지에 따라서 과거의 살았던 모든 삶은 그 종착지를 중심으로해서 프래임되고 재해석되고 재구성된다. 삶의 종착지에 대한 스토리는 우리에게 삶의 이유인 사명을 제시해준다. 아무리 미천하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갖은 과정을 통과해 훌륭한 사명이 있는 삶으로 마무리 했다면 그 사람의 과거의 모든 미천함은 훌륭한 사명을 위해 예정된 것으로 이해한다.
과거 자신의 미숙함을 구해낼 수 있는 미래의 존재이유인 사명이 없다면 리더의 길을 걷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현재는 어떤가?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다리이다. 과거와 미래가 현실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문이다. 또한 과거는 현대를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미래에 전달하기 때문에 현재가 없다면 결국 미래도 없고 과거도 뭍혀 버릴 것이다. 미래에 아무리 훌륭한 목적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현재 속에서 그것이 충분히 뿌리를 내린 상태를 만들어 나가지 못한다면 그런 미래는 몽상 속에서만 존재할 것이다. 미래 사명에 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전환시키는 시간의 장도 현재이다. 또한 옭바른 미래가 준비되어 있다면 현재는 이것을 이뤄나가는 과정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최상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딩 선생님이 학생들을 위해 외친 “까르피 디엠 (현재를 즐겨라)”은 미래에 대한 사명이 존재하고 과거에 대한 반성을 성장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선택된 사람들에게 해준 말이다. 이 사람들만이 현재를 진정한 놀이의 장으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현재가 가장 중요하니 현재를 살리기 위해 미래와 과거를 잊어라라는 조언으로 받아 들인다면 잘못된 왜곡이다.
나무에 비유한다면 과거는 우리 삶의 뿌리에, 현재는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전달해주는 줄기에, 미래는 그 줄기로 부터 영향을 공급받아 꽃을 피우고 맺게 되는 열매에 해당된다. 과거의 뿌리로부터 충분한 영향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희망찬 미래도 없다. 뜬 구름위를 걷는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과거는 그 절대치로 평가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거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인정하고 용서를 받는 것을 통해 뿌리에 영양을 공급해주기 때문이다. 과거를 숨기고 왜곡하는 것은 뿌리에 영양을 공급하지 않고 가짜 뿌리를 내세워 줄기를 세우고 그 줄기에 바탕해서 가짜 열매를 맺게 하는 행위와 같다. 당연히 지속가능하지 못한 삶으로 연기하는 삶으로 종결된다.
이건희 회장, 우청와대 수석, 김경준검사장, 홍만표 변호사 등등 우리 사회 유사리더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정체성의 대본과는 다른 쪽 대본을 놓고 연기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연기하는 정체성은 언제든지 자신의 실제 정체가 판명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주고 추락한다. 지금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가면을 쓴 연기하는 정치인들이 주류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이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한 우리 사회는 모두 연기하는 사회로 흘러갈 수 밖에 없다. 세계 시민으로 부터 존경을 받는 우리를 만든다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집단의식의 뿌리는 개인의 관심에서 발원된다. 내 개인의 힘으로 우리사회가 바뀔까의 고민은 개인의 관심을 말살시킨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어떤 개인의 간절한 믿음과 열망에서 시작했다. 이 열망이 장애를 만나도 꺾이지 않을 때 집단의식을 만들어내는 울림을 만들어냈다. 우리사회의 진정한 정체성을 가진 리더에 대한 열망을 우리 개인이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이다. 또한 우리가 먼저 개인적 관심을 넘어서서 스스로 실천에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집단의식을 만들어내기 위한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