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감옥
편견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세상은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
황석영씨의 글 중 어느 부분에 6.25 당시 인천으로 피난 가는 장면이 나온다. 밤이 되어 토굴비슷한 곳에 숨어 있는데 북한군인지 국군인지 모르는 수색 군인들이 찾아와 자신의 정체는 밝히지 않은채 손전등으로 위협해가며 이승만을 응원하는지 김일성을 응원하는지에 응답하라고 명령한다. 군인들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사는지 죽는지의 문제는 반반의 확율게임이다. 이때 황석영씨는 부친이 다음과 같이 기지를 발휘해서 가족의 생명을 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족은 너무 몽매해서 어느 쪽이 옭은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어느 쪽을 따라야 될지 가르쳐 주시면 지금부터 배우고 따르겠습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고 세상은 군인들이 황석영씨 가족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의 기회를 주거나 박탈하기 위해 정체를 밝힐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자신에게 총구를 드리대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에게 해오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산다.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해 수도없이 사살 당하지만 자신이 무엇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체성 질문에 내가 어떤 스토리로 답해왔는지에 따라 내 삶의 대부분이 결정되어 왔다.
정작 답을 피할 수 없는 국면에 몰리면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답을 이원론적 양비론에서 찾는다. 이원론적 양비론에 빠지면 확율게임을 하다가 결국 어느 순간 운이 다하고 세상으로부터 퇴출당하는 불운을 경험한다. 이원론이나 양비론은 해결점을 찾기 위해 논리적으로 문제를 이해하는 시작점이지 답이 될 수는 없다. 이중 한 쪽을 답이라고 믿고 행동하는 순간 자신은 인간본질의 문제를 놓치고 편견을 홍호하는 극좌나 극우의 정치가로 전락한다. 자신도 어느 편을 들어 세상을 정치판으로만드는데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공평하게 돌아가는 세상이 편견에 가득찬 사랑에게 기회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
사람들이 세상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양비론이나 이원론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편견의 감옥에 빠진다. 가장 창의적인 답은 이원론을 연결해 제삼지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정치가들이야 이 이원론과 양비론으로 밥먹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정치가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이원론과 양비론에 빠져 산다면 자신에게 굴러들어오는 기회의 반을 스스로 발로 차버리는 형국이다.
황석영씨 부친이 살아난 비결은 회색지대의 사고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런 기계적 중립을 유지하는 <회색지대>의 사고가 아니라 <제삼지대>의 사고이다. 제삼지대의 사고란 이 둘을 결합해서 더 높은 곳에 베이스캠프를 세우는 대안적 사고이다.
이원론이라는 편견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은 죽음으로 치닫는 것이다. 인간의 살아있는 문제를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살아 있는 문제를 놓친다면 제대로 살 수 있는 삶의 기회도 사라진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편견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체성의 답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온통 기회의 땅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