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들의 시대정신: 사랑 대 긍휼감
리더들의 시대정신:
사랑 대 긍휼감
사랑의 원래 의미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현대적 사랑은 주로 상대의 장점과 매력에 대한 끌림으로 의미들이 축소되고 있다. 상대가 단점만 가지고 있어도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장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점에 대해서 눈감아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일 것이다.
긍휼감 compassion이란 상대의 고통까지도 내 고통으로 내재화 하는 행위를 말한다. 한 마디로 긍휼감은 상대의 고통조차도 사랑하는 사랑의 극단적 형태이다. 부모가 자식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은 긍휼감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물학적 긍휼감은 부모라면 다 갖추고 있어야하고 갖추지 못했다면 오히려 예외적인 부모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생물학적 긍휼감을 보인다고 해서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리더들이 보이는 긍휼감은 사회적 긍휼감이다. 생물학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부모의 아이들에게도 똑 같은 긍휼감을 보이고 있다면 이것은 사회적 긍휼감을 보인 것이다. 직장에서 리더가 자식 뻘의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자식과 같은 긍휼감을 가지고 리더로 성장시키려는 열망을 보인다면 이 긍휼감은 사회적 긍휼감이다. 리더는 사회적 긍휼감을 내재화한 사람을 이야기 한다. 이런 리더들만이 구성원을 대상으로 자식에게 했던 것처럼 결점까지도 피드백할 수 있는 하드 토크의 용기를 보인다.
시대는 리더들에게 사회적 긍휼감을 필수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다. 왜 그럴까?
첫째, 세상의 모든 문제는 누군가의 고통을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결과이다. 고통을 오랫동안 방치하면 고통은 전염되고 궁극적으로는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로 드러난다. 문제로 드러났을 때 이 고통의 원천을 이해해서 고통의 수준에서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은 긍휼감에 대해 안테나를 가진 리더들이다. 긍휼감의 안테나가 없는 리더들은 문제를 결과의 수준에서 소방수가 발등의 불을 끄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리더로서의 문제해결력이 없는 것이다.
둘째, 긍휼감을 가진 사람들만이 마음과 맥락 속에 꽁꽁 숨어 있는 세상의 변화의 패턴, 즉 발현 (emergence)를 읽어가며 세상을 이끌어가는 창의적 행동을 할 수 있다. 세종이 글자를 모르는 백성의 보편적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한글창제에 나섰고 백성들을 문맹의 상태에서 해방시켰다.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 발명품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근원적 고통을 선제적으로 해결해주는 솔루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셋째, 긍휼감이 있는 리더들은 소통의 달인이다. 구성원 스스로도 파악하지 못하는 고통을 개념화 시켜 이 고통의 수준에서 상대와 마음을 맞대가며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진짜 친구와 가짜 친구를 나누는 기준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자신의 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친구를 진짜 친구로 생각하고 이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인다. 소통은 정보를 머리에서 머리로 옮기는 행동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잊는 행위이다. 이 마음과 마음은 상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내재화 할 수 있을 때 둘 사이에 소통의 고속도로가 건설되는 것이다.
넷째, 고통에 빠지면 여기에서 벗어나 다른 것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상대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내재화 한 사람들은 상대를 물건으로 이용하려는 성향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상대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내재화 했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온전한 몰입과 열의를 가지게 하는 원천이다. 상대를 온전한 인격체로 생각하며 인간 대 인간으로 몰입할 수 있는 사람들은 긍휼감을 가진 리더들 뿐이다.
조선의 수 많은 왕들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문제인까지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을 평가할 수 있는 수많은 기준들이 있겠지만 이들이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뛰어난 지도자로 추앙받았는지의 기준으로 긍휼감을 생각해보면 지도자에게 긍휼감이 가지는 무게를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누가 우리의 고통까지도 사랑해준 리더였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