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위력의 본질
안희정이 행사한 위력의 본질
불륜인가? 권한의 남용인가?
법관들은 김지은씨가 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반항하지 않는 것에 방점을 두고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왜 피해자로서 일관된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도 이슈로 지적했다. 김지은 안희정 판결은 법관들이 위력이 작동하는 원리와 맥락에 대해서 잘못 이해한 잘못된 판결로 보인다. 자신들이 매일 사용하는 위력이라는 힘을 스스로 과소평가하고 있는듯이 보인다.
한국말의 위력은 권력 (Power)을 의미할수도 권한(Authority)를 의미할 수도 있다. 권력(Power)에 대한 전통적 사회과학적 정의는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도를 실현시킬 개연성”이다. 권력의 행사는 노상강도 짓과 다르지 않다. 노상강도가 지나가는 행인을 흉기로 위협해서 돈을 뺏는다면 노상강도는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행인은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지갑을 내주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권력의 남용은 다 법에 저촉되게 되어 있어서 제어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권한(authority)은 권력과는 달리 힘의 행사가 제도화되고 합법화 된 상태이다. 도지사로서 비서에게 정해진 범위에서 이것저것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권한의 행사이다. 사람들은 이런 권한의 정당성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싫던 좋던 이 권한 행사를 받아들인다. 법관은 법관으로 권한이 있어서 판결을 내리면 피고나 원고는 자신의 이익에 반하더라도 그냥 받아들인다. 대통령의 통치행위도 어떤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권한의 행사여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권력(power)이 익히지 않은 힘의 행사라면 권한(authority)은 제도로 잘 익혀진 힘의 정당한 행사이다. 권한이 제대로 사용되었다면 저항이 없다.
권한은 야뉴스의 밝은 얼굴이라면 권력은 추한 얼굴이다. 하지만 둘은 같은 몸이다.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은 가끔 이 둘의 경계를 넘나들어 가며 힘을 행사한다. 권력의 사용이 권한(authority)의 도움을 받아서 행사되기도 한다. 특히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정직하고 청렴하지 못할 경우 이들 경계는 처참하게 무너진다. 또한 이들은 비서직처럼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경계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역이용해서 자신의 권력행사에 권한의 탈을 빌려준다. 엄정하게 권한을 행사하라고 공직을 부여했지만 이들은 사적이득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권한 행사에 권력의 행사를 교묘하게 끼워넣는다.
안희정이 휘두른 위력이란 도지사로의 공적 권한(Authority) 행사에 사적 권력(power)의 행사를 끼워 넣어서 상대를 교묘하게 굴종시킨 행위를 말한다. 선한 얼굴을 한 권한의 마스크를 이용해 칼을 가진 권력의 노상강도를 숨겨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아주 비양심적이고 고도의 정치적 행동을 한 것이다. 한 마디로 안희정의 위력이란 권한의 탈을 쓰고 권력의 칼로 위협해 자신의 성적욕구를 취한 행동으로 정의된다.
이런 위력의 행사를 잘 보여주는 실험이 짐바르도 교수가 1971년 스탠퍼드에서 한 감옥 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 SPE)이다. 짐바르도 교수는 70명의 지원자 중 대학생인 24명을 선발해 무작위로 죄수와 교도관 역을 맡겼으며 이들은 스탠퍼드 대학 심리학 건물 지하에 있는 가짜 감옥에서 살았다. 이들은 이것이 실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 알고 실험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역할에 예상보다 잘 적응했으며 교도관들은 귄위적으로 행동했고 심지어는 죄수들을 대상으로 가혹 행위까지 했다. 죄수 역할을 맡았던 한 학생은 너무 화가 나 실험장에서 이탈하는 등 감옥 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지자 연구진은 6일 만에 실험을 갑작스럽게 중단했다. 하지만 이런 난동자는 아주 예외적인 인물이고 대부분의 죄수들은 간수의 위력에 순종했다.
최근 이 실험은 짐바르도 교수가 간수역할을 맡은 사람들에게 권한을 넘어 권력을 행사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실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만 엄격하게 행사하며 죄수를 관리하는 양심적 간수는 소수에 불과하다. 짐바르도 교수는 보다 현실적으로 실험을 만들기 위해 간수에게 이런 사적 권력의 사용을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주문은 요구효과(Demand characteristics)이라고 해서 실험결과를 혼동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짐바르도 교수의 위력에 대한 요구는 실험을 더 현실성 있게 만들어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해보기에는 더 적절할 수 있다. 아무튼 이 감옥에서 간수는 짐바르도 교수의 요구에 따라 제도화된 권한과 사적인 권력을 섞여있는 위력을 사용했고 죄수들은 간수의 권한을 넘어선 사적 권력의 남용에도 절대적으로 순응했다. 놀라운 것은 참가자들 모두가 역할이 다 가상적 연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안희정이 김지은씨에게 힘을 행사한 공적인 권한으로 포장한 사적인 권력의 행사인 위력과 똑같은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런 사적 권력이 제도적 공적권한으로 세련되게 포장되어 사용될 때 상대의 순응 효과는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이런 위력의 행사에 자유의지를 보여가며 반항해야 한다고 판결하는 판사들이 지독하게 순진한 것이다. 투사가 아닌 일반사람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반항하는 것이 오히려 예외이다. 특히 사적인 권력이 공적권력으로 포장된 위력의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심지어 죄수들은 사적 폭력을 행사하는 간수에게 더 잘보이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포기하는 구걸행위를 보였다. 김지은씨의 이율배반적 행동은 나름대로 이런 위력행사에 저항해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저항을 유발했다면 제대로된 위력이 행사되지 못한 것이다.
이심판결에는 공적권력과 사적권력을 교묘하게 섞어가며 자신의 사욕을 취하는 행동이 일반인이 아닌 공인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것인지를 명명백백하게 가르쳐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일반인들의 문제라면 이것을 단순히 불륜의 문제로 종결지울 수 있겠지만 안희정과 같은 공적 권력을 할당받은 공인들에게는 잘못된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 공적 결과를 가져오는지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 이심에서도 일심에서처럼 법원이 공인과 일반인의 맥락을 구별하지 못하고 권력형 범죄를 일반인들의 불륜의 문제로 치환해서 판결한다면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사법역사상 한번도 판결로 자신들의 공정성을 증명해본적이 없는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경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