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황을 끝낼 수 있을까?
나는 내 삶의 방황을 끝낼 수 있을까?
끝없이 반복되는 삶의 변주곡
내가보기에는 어떤 사람들은 끝을 발견하고 눈을 감고 임종을 맞는 행운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 끝을 찾지 못한 회한 떄문에 눈을 감지 못하고 임종을 맞을 수도 있다.
이들의 운명은 어디에서 갈라지는 것일까?
내 몸에 맞는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았다고 생각해보자. 이 자세 때문에 당분간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몆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까? 가장 편했던 자세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불편해지고 이 시점부터 이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감옥이 된다. 살아 있는 우리 몸은 선천적으로 어느 틀에 맞춰 갇혀 사는 삶을 거부한다. 나는 살기 위해 어느 시점이 되면 내 몸에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몸은 해방된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본능적으로 다시 안락한 자세를 찾는다. 물이 오랫동안 고여있으면 썩듯이 해방되지 못한 몸을 간직하고 산다면 병을 얻는다. 암을 얻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해야 하는 것이 자신이 살던 장소를 탈출하는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같다.
내가 공들여 만들어 놓은 최적화된 안락한 삶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화되고 일상화되면 삶은 나에게 감옥이다. 정체된 삶은 안락에서 시작해서 감옥으로 끝을 보여준다. 감옥 속에서 서성이며 쳇바퀴도는 삶에서 탈출해서 여행이라도 떠나야 한다. 여행 속에서 헤메다보면 다시 안락한 집이 그리워진다. 내가 돈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어도 삶의 일상화에 대한 철칙에는 예외가 없다.
일상화의 감옥에 갇혀있는 삶의 상태가 아포리아 상태이다. 이 아포리아는 가장 편한 자세처럼 처음에는 자신에게 최적화된 삶의 형태였다. 아포리아에 절망감을 느낄즈음 어떤 계시에 의해 이 아포리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아포리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길을 떠나 사막을 헤메는 상태가 디아스포라이다. 디아스포라의 사막을 헤메가며 찾는 것은 오아시스일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방황을 통해 새 오아시스를 발견해도 결국 이 오아시스의 삶이 익숙해지면 오아시스도 다시 아포리아의 감옥이 된다. 다시 아포리아의 감옥을 탈출할 것을 꿈꾸고 이런 탈출과 방황은 죽는 순간에도 끝나지 않는다. 삶은 일상화가 만든 아포리아와 감옥에서의 탈출인 디아스포라의 반복이다.
감옥, 탈출, 방황의 삶의 무한 변주곡은 자신의 삶의 존재이유인 목적을 발견하는 순간 멈춰진다. 사람들이 방황하고 감옥을 탈출하는 것도 결국 이 목적을 발견하고 이 목적을 실현하는 삶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더 나은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을 삶의 목적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은 삶의 변주곡의 끝을 들을 수 없다. 목적을 발견한 사람들만 방황을 멈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