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잣대와 윤리기준
법의 잣대와 윤리적 기준
과연 같을까?
법을 제대로 지키고 살면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청문회에 나와서 검증을 받는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법적으로 문제가 없어도 윤리적이지 못한 삶을 산 사람들이 태반이다. 법은 자신의 행위가 남들에게 침해를 가한 사실에 대해서 실제로 침해가 일어났을 때 이 침해를 어떻게 원상으로 돌려놓을 것인지를 규정한 것이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삶았다는 것은 최소한의 윤리적 삶을 산 것이다. 법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행복과 복지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 윤리적 삶의 기준이다. 이런 점에서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은 윤리적 삶의 최소한의 기준을 통과한 것이지 윤리적 삶을 살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의 문제도 비슷한 이슈다. 이들의 해명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지금까지의 삶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삶을 살았다고 인정하더라도 이들이 공공의 이익을 지켜야 되는 윤리적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임명을 놓고 찬반이 갈리는 것이다.
공직자의 자질 검증에서 동원되는 국민들의 눈높이라는 것은 법의 기준에 맞춘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법적기준보다 더 안쪽에 위치한 법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는 상식적이고 윤리적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묻는 것이다.
노동과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미선 후보와 대부분 돈있는 악마들을 옹호한 댓가로 돈을 번 남편은 창과 방패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정내에서 역할에 대한 이해충돌이 예상되는데 실제로 헌법재판관에 임명되면 이들이 과연 이해충돌을 제대로 조정할 수 있을까에 의구심이 들었다. 이들이 서로 역할을 견재할 수 없는 부조리한 조합이란 생각이 남편 변호사의 행동에 그대로 드러난다. 한 가정에서도 인권과 돈에 대한 윤리가 명백하게 이해충돌하는 삶을 사는 부부에게 헌법재판관의 중책을 맡긴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자신이 맡았던 재판의 이해충돌에 대해서 애매모호하게 해석하는 것에서 비롯해 주식투자에 단타로 몰입해서 돈을 잃은 행동이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어도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요구되는 윤리적 기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주식투자에 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주식을 단타매매하는 일로 자신의 삶을 보내지 않는다. 주식은 장기적 가치를 생각하고 투자해 놓으면 돈을 잃을 일이 없다. 주식투자로 돈을 잃었다는 사실자체가 돈만을 위해 손절매의 투기를 일삼았다는 이야기이다. 선한 마음과 미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회사를 정직하게 경영하는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눈앞에 돈만을 쫒아 하루에도 수십번씩 손절매하는 투기자들이 자본주의를 침해하는 적이다. 자신이 개미투자자라고 변호하는 것자체가 자본주의의 윤리보다는 돈만을 쫒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차라리 그 금액의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윤리적이다.
임용하는 자리가 다른 자리도 아닌 법의 정당성에 대해서 판단하는 엄중한 헌법재판관의 자리다. 윤리와 철학적 기준이 아니라 법적으로만 문제가 없는 삶을 산 사람의 기준만 가지고 이 자리에 적격한 사람인지를 따지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이번에도 임용을 강행한다면 이 정부는 최소한의 법적 테두리에서 움직이는 정부이지 촛불의 시대정신을 실현하는 윤리적 정부는 아님을 스스로 천명하는 것이 된다. 이전의 정권과 자신들을 차별화시키던 논리를 스스로 무너트리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