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데우스의 환상
아침 산책 길 단상
호모데우스
산책은 거친 생각을 소화시켜주는 뛰어난 소화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학생들과 산책하면서 이야기하고 논의한 것들을 모아서 학파를 만들었다. 소위 소요학파가 그것이다. 인간에게 산책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철학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아침 산책 길을 나오면서 화두로 가지고 나온 내용은 구글이 신을 대체할 수 있을까이다. 아니면 기술적으로 진화한 호모데우스가 나타나면 신은 자연적으로 소멸하는 것일까?
영적인 문제는 구글에서 물어보면 답을 해주는 차원보다는 더 근원적인 것이다. 하지만 종교가 이 근원적 질문을 선제적으로 이해하고 여기에 제대로 된 답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편의상 구글에서라도 신를 찾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구글을 우상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지금도 이미 구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상화되어 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이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되면 결국 신의 상태가 되는 호모데우스가 신을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이 늘었다.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한 불확실성이 제거된다면 이 문제에 대해 종교가 점유해왔던 질문들이 무효화 될 것이다. 이런 유발 하라리 계열의 기술진화론자들의 주장들에 대해 종교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이들을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외면한다면 종교는 결국 무너질 것이다. 이들의 질문에 더 근원적으로 맥락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프란시스 교황도 교회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선제적으로 답변을 못함을 통해서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를 성장하게 해주지 않는 신앙은 그 자체로 성장해야 할 믿음이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질문을 받아야 할 신앙이다. 잠든 우리를 깨우지 않는 신앙은 깨어나야 할 신앙이다. 우리를 뒤 흔들지 않는 신앙은 뒤 흔들려야 할 신앙이다. 머릿속에만 머물고 미온적인 신앙은 ‘신앙’이라는 개념일 뿐이다.”
교회가 영적 성장의 플랫폼이 되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과거의 성공에 갇혀 미래의 불안을 해결해줄 수 있는 영적 성장의 끈을 놓쳤다. 초연결 디지털 혁명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백년전에 했던 똑 같은 내용을 신앙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암송하라고 강요한다면 이런 행태는 영적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감옥 속에 교인들을 가두는 행위를 한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 카톨릭 교회가 신도들을 대상으로 했던 행동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영적 성장을 위해서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믿음이 부족한 것이라고 몰아세운다면 요즈음 말로 하면 교회가 믿음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갑질을 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교회가 유럽의 교회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초연결 디지털 시대의 영적 문제에 대해서 선제적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신앙과 믿음을 시대에 맞춰 공진화하지 못하면 결국 사라져버리는 문제에서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잠든 신앙에서 깨어나 시대의 맥락에 맞는 질문들을 던지지 못한다면 호모데우스에게 교회를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이 먼저 교회에서 나와서 초연결시대의 디지털 혁명에 대해서 심도 있게 공부하는 노력이 필요해보인다.
아침이 다시 선선해져서 산책하기는 안성 맞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