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다
길을 잃다.
절대로 길을 잃을 일이 없을 것같은 별과 바람의 시인 윤동주도 가끔 길을 잃어 버린 경험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길을 잃었는데 새로운 길이 나타나지 않을 때의 곤혹스러움을 <길>이라는 시에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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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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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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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상황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자기 삶에서 단절되어 있을 때 등장한다. 사람들이 길을 잃으면 분절적인 길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영광만을 노래하던지, 의미없는 현재 일에 자신을 중독시키든지, 아니면 미래의 헛된 희망을 위해 현재과 과거를 희생한다. 윤동주의 길에서 저녁은 과거를 아침은 미래를 의미한다. 길 잃은 사람들이 찾아야 할 길은 오래된 새길이다. 오래된 새길은 지금 걷고 있는 현재의 길에 과거와 미래가 온전하게 연결된 길이다. 오래된 새 길은 과거, 현재, 미래가 온전하게 화해했을 때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된 새길은 과거가 씨줄이 되고 미래가 날줄이 되어 만들어진 길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길을 잃고 나는 담벼락 저쪽에서 불안을 못이겨 서성이고 있다. 나의 삶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연결되어 있을 때만 온전한 길이기 때문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내 길이 어디에서 끊어졌는지 질문을 던진다.
길을 잃었을 때 윤동주가 던진 질문이 바로 정체성에 대한 자기정의 질문(Self-defining question for identity)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결국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에 대한 질문이 정체성 질문이다. 이 정체성 질문에 답을 얻었을 때 던질 수 있는 심화 질문이 자기정의 질문 self defining question이다. 자기정의 질문은 이런 과거 현재 미래의 맥락이 주어졌을 때 나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누구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끊어져 길을 일은 나는 오래된 새길을 찾아 이들을 연결하기 위해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가끔 길을 잃었을 때마다 길을 찾기 위해 자기정의 질문을 던졌다. 온 나라가 길을 잃었을 때도 온 국민이 촛불을 밝히고 길을 찿아나서며 자기 정체성에 관한 자기정의 질문을 던졌다. 이게 나라냐? 이게 대통령이냐? 이게 국회냐? 이게 판사냐? 이게 목회자냐? 이게 검찰이냐? 우리를 잃어버린 길을 잇기 위해 촛불을 어디에 밝혀야 하나?
정체성에 대한 자기정의 질문으로 자신의 길을 제대로 발견하면 길은 다시 오래된 옛길에서 오래된 새길의 모습을 드러낸다.
요즈음 미국, 일본, 중국을 중심으로 국제정세가 돌아가는 모습을 볼 때 정체성에 대한 자기정의 질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은 미국시민과 일본국민들이다. 트럼프와 아베를 향해 미국 시민들과 일본 국민들은 자기정체성 질문을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국민에게 총기난사를 은연중에 교사하는 대통령이 이끄는 나라가 나라냐? 이게 미국이냐? 자국민에게 과거를 철저하게 잊으라고 가르치는 수상이 이끄는 나라가 나라냐? 이게 일본이냐? 이런 나라도 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냐? 똑같은 자기정의 질문을 지금 홍콩시민들이 우산을 쓰고 거리로 나서서 던지고 있다.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자기정의 질문으로 자신들의 새 길을 찾아나선 홍콩시민의 용기를 격려해야 한다. 이들이 던진 자기정의 질문들은 우리에게 메아리로 돌아와 우리도 다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게 나냐? 이게 회사냐? 이게 정치냐? 이게 장관이냐? 이게 한 나라의 지도자들이냐?
아침에 다시 안산자락길 산보에 나섰다.
걷게될 이 길이 오래된 새길이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