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삶
내 삶에서 내가 주인이 못되는 이유
일인칭 대 삼인칭 삶
김민기씨가 <아침이슬>을 완성할 수 있었던 계기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아침이슬을 작곡하다 막히면 다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막히면 아침이슬로 돌아가 곡을 완성해려해도 완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자신 집주위 무덤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계시를 받듯 <그>를 <나>로 바꾸게 되었고 그 순간 아침이슬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침이슬의 <나>는 완성되기 전에는 <그>였던 것이다.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 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스토리는 대부분 3인칭 문법인 <그>로 채워져 있다. 심지어 내가 실제로 수행하는 대부분 역할들도 따지고 보면 다 삼인칭 문법이다. 부모님이 그랬어, 회사에서 본부장이 그러라고 했어, 목사님이 그랬어, 선생님이 말했어, 친구가 그랬어, 어떤 위인전에도 나와 있어, 과학잡지에 나와있어, 유명한 자기계발서에 나와 있어 등등 내가 수행하는 역할 중 삼인칭 아닌 것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나는 삼인칭인 그가 써논 내 역할에 대한 대본을 연기하는 연기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연기자로서 남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것이다.
삶의 문법이 <삼인칭>인 그의 문법에서 우리가 전제된 <일인칭> 문법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진정성 있는 주체적 삶은 가능하지 않다. 아무리 새로운 것을 배워도 이 새로운 것이 일인칭으로 전환된 내러티브가 되어야 자신의 세상을 보는 지도인 정신모형을 업데이트하는 일에 사용되어진다. 삼인칭의 삶으로는 자신의 지도를 업데이트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영향을 미치지 못한 지식으로 머물다 사용이 빈도수가 떨어져 결국은 자연스럽게 잊혀진다. 일인칭 내러티브는 자신의 삶의 지도를 업데이트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삼인칭 문법은 객관화된 명사적 삶을 강요하는 것이고 일인칭 문법은 동사화된 주관적 삶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다. 진정성 있는 동사화된 삶은 일인칭으로서의 <내가> 나의 삶에 대한 대본을 스스로 마련하고 이 이야기를 삼인칭에게 들려 줌으로 피드백과 지원을 받아서 실제로 <내> 삶을 완성할 때 달성된다. 자아를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로 자아를 구분할 때 내적 자아는 스토리 작가이고 외적자아는 이 스토리의 대본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스토리텔러이다. 우리의 주체적 삶은 이 두 자아가 제대로 협업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스토리 작가인 내면적 자아가 나에 대한 대본을 제대로 완성하고 외면적 자아인 스토리 텔러는 내재적 자아가 쓴 나의 스토리를 전파함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지원을 이끌어낸다. 또한 스토리 텔러는 그들로 부터 들은 내 스토리의 미진한 점에 대한 피드백을 내재적 자아에게 전달해주는 에이전시인 것이다.
조직에서 한 때 권한위양이니 임파워먼트 등의 프로그램이 유행한 적이 있었지만 제대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임파워먼트의 본질에 대해 잘못 알고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파워먼트는 역할 스토리를 쓸 수 있는 권한을 구성원에게 넘겨주고 실제로 구성원이 역할 스토리를 쓰고 이 스토리를 수행해서 완성시킬 수 있을 때에 달성되는 것이지 단순히 권한을 넘겨주는 것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권한을 넘겨주었어도 자신의 역할 스토리를 권한 범위에서 써가지 못하면 임파워먼트의 의도는 무산된다. 물론 <나>의 역할 스토리는 조직이 설정한 목적이나 존재이유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쓰여진다. 이 범위는 우리라는 맥락을 제공해주지만 결국 이 우리도 일인칭 문법이다.
요즈음 기업들에서 고심하고 있는 인게이지먼트는 더 무리한 요구이다. 인게이먼트는 자신의 영혼을 자신이 하는 일과 섞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데 영혼없이 3인칭 역할만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강요하는 회사가 종업원에게 임파워먼트를 넘어 인게이지먼트까지 넘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회사가 종업원을 삼인칭 삶을 강요하는 것을 넘어서서 영혼 없는 좀비로 전락시켜놓고 이제는 영혼을 가져오라고 주장하는 장면은 물에서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형국이다.
누구든 어떤 일을 통해 <그의> 스토리를 구현하는 삶과 <나의> 스토리를 구현하는 삶을 선택하라면 당연히 나의 스토리를 구현하는 주인공의 삶을 선택할 것이다. 일인칭이 제공하는 에너지와 삼인칭이 제공하는 에너지는 천지차이다. 하지만 대부분 회사에서 직원들의 일과 역할에 대한 문법은 다 삼인칭이다. 초일류기업이라고 일컬어진 기업들만 일인칭 문법을 허용한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일반기업에서 사람들은 삼인칭 <그>의 역할을 대신해 수행해주는 대신 월급을 받는다. 월급에는 암묵적이기는 하지만 일인칭 문법을 사용해 주인으로 나서지 않는 조건이다. 초일류기업들에서 시도되고 있는 사명지향 역할조직 설계라는 것은 우리라는 맥락하에 일인칭 문법을 사용하도록 허락하고 여기에 공정한 월급도 덤으로 주는 것을 의미한다. 월급이 차라리 덤인 것이다.
옛날 기업비리의 백화점으로 불렸던 한보그룹 전임회장 정태수씨가 법정에서 자신회사의 임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생각난다. <걔들 머슴들이 뭘 알아?>.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한민국의 대부분 기업들은 삼인칭 문법을 통해 종업원에게 머슴역할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머슴들에게 임파워먼트 인게이지먼트 등을 이야기해가며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강요하는 꼴이다. 한 마디로 이런 무책임한 기업의 관행은 기업의 종업원에 대한 갑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