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경계를 넘어선 긍휼감
가족 경계를 넘어선 긍휼감:
공정과 정의의 뿌리
진성정치인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링컨이 아이였을 때 뉴올리언즈 노예시장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링컨은 노예시장에서 각기 다른 주인들에게 팔려가 한 가족이 생이별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다른 집에 팔려가는 아버지와 헤여지지 못해서 아버지의 목에 메달려 어린 딸이 노예주인에게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링컨은 어른이 되면 이런 더러운 제도를 깡그리 깨부수는데 인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똑 같은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지만 왜 링컨에게 이 장면이 유독 충격을 주었을까?
링컨의 남다를 궁휼감 때문이었다.
긍휼감(compassion)은 남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생각하고 이 문제를 생각을 넘어서 행동으로 풀어나가려는 성향을 말한다. Passion의 원래 의미는 고통이고 Com은 이 고통을 같이 나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고통을 그냥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은 공감(empathy)이다. 긍휼감이 공감과 다른 것은 행동능력에서 이다. 한 마디로 긍휼감은 상대의 고통을 성공적으로 일인칭화 시킨 사람들이 느끼는 도덕적 감정이다.
긍휼감의 시작은 역지사지로 상대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일인칭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 가족이 저 노예의 가족이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저 노예였다면 나는 어떤 고통을 느꼈을까? 그리고 내가 저 입장이었다면 나는 나의 어떤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을까를 성찰하는 능력이 긍휼의 능력이다. 상대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내재화 시켜 이해할 뿐 아니라 내가 행동에 나서면 무슨 행동을 해야할까의 행동까지 일인칭화 할 수 있는 능력이 긍휼이다.
긍휼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사명을 도출한다. 사람들이 가진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원인(cause)의 수준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이 해결책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면 이 문제를 인간 존재의 보편적 문제로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이 해결한 고통의 문제를 인간의 보편적 문제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확장책으로 제시된 것이 사명이다. 링컨의 경우 노예들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원인 행동으로 시작한 것이 노예해방이고 이 노예해방이 결실을 맺자 이 노예 문제를 인간에 의한 인간의 보편적 문제로 인식해서 사명화했다. 인간이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노예화로 규정한 것이다. 이런 인간의 노예화가 삶의 보편적 문제 속에 편재되어 있음을 알고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라는 민주주의 사명을 도출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시작과 끝은 긍휼감이다. 지금까지 인류의 누군가가 상대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내재화 해서 내 행동으로 풀어가려는 일인칭화가 없었다면 행동도 만들어질 수 없었고 사명도 도출될 수 없었고 지금 우리가 당연히 느끼는 번성도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지도자가 평소 자신의 말대로 남의 자식의 고통을 내 자식의 고통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행동의 수준에서 풀 수 있는 긍휼감을 가지고 있었는지의 문제로 뜨겁다. 제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정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남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일인칭화 해서 풀어나가려는 성향이 리더들에게 숙성되지 않는다면 제도로 만들어 놓은 정의는 뿌리가 없는 것이다. 특히 한 사회의 리더들에게 남의 고통조차 내 고통으로 역지사지하는 긍휼감이 없다면 정의는 뿌리가 뽑힌 것이다. 리더들이 증명해야 할 정의란 긍휼감을 자신의 가족에게만 적용하는 것을 넘어서 남의 가족에게도 똑 같이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가족도 우리 가족과 똑 같은 인간으로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만 긍휼의 리더로 거듭난다. 남의 가족도 자신의 가족처럼 똑 같이 취급할 수 있는 능력이 리더에게 요구되는 긍휼감이고 리더들에게 이 긍휼감이 결여된 사회의 정의나 공정성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자신의 가족인지 아닌지를 넘어서 상대도 똑 같이 인간 존재로서 대우 받기를 원한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는 긍휼의 정치가들을 대한민국에선 언제쯤 기대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