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처럼 춤출 수 있을까?
아이처럼 웃고 춤출 수 있을까?
중력에서 벗어나다
니체는 인간의 삶은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단계를 거쳐 가며 성숙한다고 비유한다.
먼저 인간의 삶 중 낙타는 주인이 맡긴 무거운 짐을 지고 주인인 시키는대로 살아가는 단계이다. 가장의 짐을 지고, 죄인이라는 짐을 지고, 책임감과 죄책감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노예의 단계이다. 낙타의 삶을 산다면 삶에 주도성도 빼앗겼기 때문에 누가 시켜야만 일을 하고, 단지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생각에 일하고, 중요한 일을 자꾸 미루고, 자신의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이야기하고, 친구의 조언에 짜증만 내고, 작은 일을 벌였다가도 곧바로 포기하는 성향을 가졌다.
사자의 삶은 포효하는 삶이다. 이들은 남들을 지배하는 삶을 추구한다. 남들을 지배하기 위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축적한다. 낙타가 무거운 짐을 져야 되는 것도 사자들의 명령 때문이다.남들을 지배하기 위해 삶은 고독한 삶이다.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돈, 명예, 권력을 축적해보니 더 높은 돈, 명예, 권력이 보이고 이들을 무한정 쫒아가며 사는 것은 시지프스의 돌굴리기 같은 삶이다.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온갖 무모한 일에 맹목적으로 올인하다가 인생은 망가진다. 지배력을 넓히기 위해 남들을 수단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사자들의 삶에는 친구가 없다.
마지막 단계는 어린아이 단계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을 가지고 삶을 놀이처럼 사는 단계이다. 이들은 재미 있는 놀이를 위해 친구를 불러들이고 질문을 하고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나간다. 사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목표가 있어야 하지만 어린아이의 삶은 목표의 종착역인 목적을 추구하는 삶이다. 어린아이의 삶을 산다는 것은 자신이 만든 목적을 추구하는 것으로 자신만의 운명을 만들고 자신이 만든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삶이 즐거운 이유는 자신이 삶의 목적을 스스로 설계하고 이를 추구해가면 놀이처럼 살기 때문이다.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삶에서는 삶 자체가 목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삶이다.
낙타와 사자는 춤을 출 수 없지만 어린아이는 신나게 춤추는 삶을 즐긴다. 춤을 춘다는 것은 중력의 명령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아이는 낙타가 진 짐도 사자가 굴려야 할 시지프스의 돌의 무게도 없기 때문에 중력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다. 어린아이들을 관찰해보라. 어린이들에게는 삶자체가 신나는 춤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내면에 이런 아이 하나를 키우고 산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아이를 키우는 목적을 깨달지 못해 이 아이를 기형적 성인아이로 만든다.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깨달은 순간 우리는 이 아이와 화해하고 친구가 된다. 내면에서 잠자고 있는 이 아이를 깨워 아이와 허그하고 이 아이에게 친구처럼 간지럼을 치면 이 아이는 다시 웃기 시작할 것이다. 삶에 어린이의 웃음과 천진난만함과 신나는 춤이 다시 찾아온다. 목적을 깨달고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삶이 우리를 낙타와 사자의 짐으로부터 자유케 한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삶을 되돌려 받은 것이다.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통해 우리는 아이의 웃음도 되찾고 아이처럼 춤추는 것도 가능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니체가 주창하는 어린이가 되어 춤추지 못함은 예수께서 선데이 크리스챤인 짐진 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너희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통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설교(마테복음 11장 )하는 장면과 맥이 같다. 예수께서 설파한 신실한 기독교인(authentic christian)이란 성인아이로 잠자고 있는 아이를 성령으로 깨워 춤추는 어린이로 살려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