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공진화가 문제다.
종교는 과학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일까?
믿음의 공진화가 문제다.
유럽에서 교회가 텅텅 비어가는 현상은 신념의 죽음 혹은 믿음의 제도화를 상징한다. 미국과 캐나다 사람들 대다수가 크리스마스를 가장 큰 명절로 여기지만 실제로 이들 중 교회에 가는 사람들은 보기 드물다. 겉으로 보기에는 과학의 이성과 종교의 신념의 대결에서 종교가 점점 수세에 몰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종교가 점진적으로 죽음을 당하는 현상이 한국교회에서도 재현 될 것인가?
최근에 대표적 무신논자이자 세계적 석학 4명이 종교와의 싸움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는 대담집을 출간했다. 고인이 된 히킨스를 제외하고 세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추가해 <네 명의 흑기사 Four Horsemen>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자신들을 요한복음에서 세상에 종말이 왔을 때 나타난다는 네 명의 흑기사로 비유했다. 이들의 대담 내용을 들어보면 아이러니 하게도 현재의 종교가 과학과의 싸움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고 이를 통해서 어떻게 부활해야하는지에 대한 힌트가 담겨있다.
이들의 주장 중 가장 핵심적 주장은 종교의 자기방호성의 문제이다. 이들은 이성적 과학 신념의 종교를 자기 방호성의 측면에서 비교한다. 과학은 자기방호성이 없다. 사실이 드러나면 쿨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종교적 신념은 신념에 반하는 사실이 드러나면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고 다른 사실을 끌어들여 가면서까지도 신념을 지키는 작업에 몰입한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크리스티앵은 속좁고 편견이 많은 사람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결국은 이러는 과정을 통해 종교는 신념의 감옥 속에 스스로를 고립시켜 사망하게 하는 운명에 처한다고 주장한다. 중세에는 사실에 근거해 신념의 수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배교자라는 이름으로 박해를 가해 죽음이 이르게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념과 이성이라는 이원론적 주장을 반대한다. 종교는 종교로서 제대로 된 신념의 안경을 통해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정신세계에 대한 통찰과 긍휼감의 원천을 제시해 왔다. 과학은 지식의 진보를 통해 우리가 아는 객관적 세상을 업그레드해왔다. 종교가 과학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는 과학이 가진 쿨함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지금까지 사실이라고 믿어온 주장을 기각하는 다른 객관적 사실이 드러나면 그냥 쿨하게 이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임을 통해서 과학을 진화시켜왔다.
종교는 이런 사실이 나타나면 9.11 때 미국의 근본주의와 이스람의 근본주의가 충돌해서 전쟁에 돌입했듯이 각자의 주장을 지키기 위한 십자군 전쟁에 몰입한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대부분의 전쟁은 자신의 신념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신념간의 십자군 전쟁이었다.
본인은 최근에 저술한 <황금수도꼭지: 목적경영이 이끈 기적>에서 죽음을 자초하는 믿음과 번성의 기반이 되는 믿음의 비밀을 분석했다. 믿음은 변화하는 세상에 통찰력을 제공하는 제대로 된 안경을 제시하지 못할 때 점진적 죽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변화하는 세상에 새로운 영성과 통찰력을 제시하지 못할 때 자신들이 만든 믿음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감옥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믿음을 진화시켜 믿음을 살려내는 기제를 공진화라고 규정했다.
공진화는 두 가지 기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세상은 이미 믿음의 도움으로 세상이 많이 변화했는데 변화한 세상을 인정하지 않고 기존의 믿음을 지키는 일에 매진해 결국 믿음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첫째 기둥은 종교가 믿음의 감옥인 아포리아의 감옥을 인정하고 여기서 스스로 탈출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아포리아는 지금까지 받아들였던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전처럼 작동되지 않는 것에 대한 자기반성이다. 다른 하나는 아포리아를 벗어나 사막여행을 통해 새로운 믿음의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디아스포라의 여행을 감행할 수 있는 용기이다. 아포리아에 대한 각성과 디아스포라의 여행을 통해 믿음을 성공적으로 진화시켜 믿음을 통해 새로운 번성을 구가할 수 있는 플랫폼이 제시될 때 믿음은 점진적 죽음에서 기사회생한다.
믿음이 없다면 사고의 근육이 없는 것이어서 과학이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해도 이것으로 실질적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 좋은 믿음에 대한 종교적 활동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문명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막스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따르면 자본주의도 기독교적 영성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변화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문제는 믿음의 방어기제적 속성에서 파생한다. 종교도 방어기제를 벗어나 과학처럼 새로운 사실이 나타났을 때 진리의 자리를 내주는 겸손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기존의 믿음이 새롭게 전개되는 세상에서 우리를 감옥에 가두고 심지어는 우리를 장님으로 만들고 있다는 피드백들이 들어오면 죽음을 무릅쓰고 기존의 믿음을 지키기보다는 이 믿음을 공진화시킴을 통해 믿음의 본질을 살려내는 겸양이 요구된다. 살아 있는 믿음은 살아 있는 나침반처럼 세상을 향해 항상 떨림을 유지한다. 떨림이 없는 나침반은 죽은 믿음의 부러진 나침반이다.
결국 종교는 과학적 이성과의 싸움에서 패배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겸손함을 유지하지 못해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굶어 죽을 개연성이 더 높다. 종교가 과학으로부터 배워야할 점은 믿음을 공진화 시키는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겸양이다. 종교가 사라지는 이유는 과학 때문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겸양부족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