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만점
시대착오적 언론보도
수능만점
수능만점 맞은 학생들의 기사를 대서특필하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특히 만점자가 비싼 과외를 받지 않고 학교공부에만 충실해서 만점을 맞았다고 알려진 경우는 특종감이 된다. 모든 학교에서는 이런 학생의 신화적 이야기가 발굴되어 모범생의 전형으로 설정되고 모든 학생들이 따라야 할 규범으로 강요된다.
나는 이런 기사가 불편하다. 이런 모범생 신화가 한국의 창의성을 망치는 주범인데 신문방송이 이런 스토리를 영웅적 스토리로 미화하기 떄문이다.
수능점수는 대한민국의 모범생의 가장 중요한 척도이다. 하지만 수능이라는 것이 결국 달달 암기해서 단 한번 주어진 기회에서 실수하지 않고 풀어놓을 수 있는 시험기계의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다. 미래를 선도적으로 창출해가는 능력과는 전혀 무관한 수능점수를 토대로 사회에 알려진 성공기회를 배분하는 유일무이한 잣대로 사용하는 관행이 사회를 닫히고 불공정한 사회로 제도화한다.
아인쉬타인은 천재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놓았다. 수영의 천재인 물고기를 나무 타기 능력으로 평가하려 한다면, 물고기는 평생 자기가 바보라고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아인쉬타인도 이런 모범생 교육 시스템의 희생자였던 아인쉬타인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천채적 재능은 영원히 발굴되지 못했을 것이다. 암기한 것을 실수하지 않고 시험장에서 쏟아내는 일에는 능하지 못하지만 창의적 능력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아인쉬타인과 같은 통찰력을 가지고 태어난 학생들은 대한민국에서는 결국 학습지진아로 퇴출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경험하는 구조화된 불평등은 모든 사람들을 원숭이라고 가정하고 물고기로 태어났어도 수영을 포기하고 나무를 타라고 명령한 결과이다. 학교와 회사는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나무타는 능력을 평가해서 성적과 성과를 산출하고 이에 따라서 기회를 차등적으로 분배해왔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막스주의자들의 주창한 <기회의 평등>이 가져다 준 최대 오류이다. 물고기에게 나무를 탈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부여해도 물고기는 영원히 낙제를 할 수밖에 없다. 원숭이과에 속하는 특정한 동물들만 득세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기회의 평등>은 막스의 의도와는 달리 평등이란 이름으로 사회가 발굴해내지 못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낙오시켜 불평등을 구조화시켰다. 막스주장과는 달리 계층의 대물림은 <기회의 평등>을 강요한 결과이다. 나무타는 재능이 없는 사람들에게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줄테니 평생 나무타는 원숭이를 흉네내는 연기자로 살으라고 명령하는 시스템이다.
미래의 세상은 정해진 답이 없는 세상이다. 이 미래가 열릴 수 있는지는 이 세상을 짊어질 젊은이들이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 의해서 결정된다. 미래의 열린 세상에서 제대로 된 답은 다양한 재능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어울려사는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차별화시키는 목적의 회전그네를 공동으로 돌리는 것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다양한 재능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공통으로 지향하고 있는 목적의 회전 그네를 같이 돌릴 때 고유한 재능과 배경에 따른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사회는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다양한 재능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과 배경을 통해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지의 <기회의 다양성>을 발굴하는 사회로 전환되어야 한다. 고유한 정체성은 자신의 재능과 열정과 배경이 목적을 향해서 정렬되어 있을 때만 살아난다. 암기하고 실수하지 않는 단일능력을 측정해서 임의로 상하 분포를 정하고 이를 통해 사회성공의 기회를 배분하는 사회는 사회계층을 닫히게 만든다. 수능으로 모든 기회를 분배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기회의 평등이라는 십자가를 내세워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십자군 전쟁이다. 부모가 가진 재력을 이용해 자식에게 잘 외우고 시험에서 실수하지 않고 비법을 전수할 수 있으면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는 수능점수를 통해 자신의 계층을 세탁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수능이 이용된다. 이처럼 수능점수가 다양한 잣대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기회의 잣대로 이용될 때 교묘하게 계층을 대물림하는 것을 정당화시켜서 사회계층의 문을 닫는다. 수능만점을 대서특필하는 언론은 이런 기회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열린 사회의 적이다.
초연결 디지털 혁명시대를 맞이해서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다양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목적의 회전그네를 돌려가며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가며 공동의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한 다양한 기회들을 발굴할 수 있을 때 해법이 찾아진다. 목적을 전제로 다양한 기회의 발굴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질 때 물고기에게 나무를 타라고 명령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를 깨달게 된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한 <기회의 다양성>에 치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요즈음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수시/정시의 비율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공동의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한 기회의 다양성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세월이 지나도 사회에서 외우고 실수하는 능력을 측정하는 수능만점을 대서특필할 것이다. 외운 것을 실수하지 않고 쏟아내는 능력이 요구되는 직업은 법조인과 의사 뿐이다. 법조인과 의사도 필요하지만 모든 젊은이를 다 법조인이나 의사로 키우다 수능점수를 통해 대부분이 버려지는 젊은이들로 키우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법조인과 의사는 사회를 유지하는 직업이지 가치를 창출해 미래를 여는 직업이 아니다. 법조인과 의사에 의해서 미래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미래 가치의 생산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인재들이 발굴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능기사의 대서특필은 언론이 미래를 닫아버리고 불평등을 정당화 시키는데 앞장 선 것이다. 이럴수록 우리 사회는 초연결 디지털 시대의 혁신에서 점점 멀어질 것이다. 초연결 디지털 혁명시대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미래에 실현될 목적의 회전그네를 같이 돌리는 것을 통해 기반이 형성된다. 기회의 다양성만이 미래의 번성을 약속해줄 수 있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시대는 이미 AI과 휴대폰이 상용화된 시대다. 시험장에 휴대폰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면 수능만점자를 무한 복제해낼 수 있는 시대를 역행해가며 언론은 수능만점과 같은 시대착오적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 기사를 쓸 시간이 있다면 우리사회에 잘 안 알려진 숨겨진 기회들을 찾아내서 교육으로 공론화 시키는 일에 더 매진했으면 한다. 이런 특종기사를 읽을 때마다 언론이 시대정신을 잃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