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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은 어느 선까지 공정한가? 공정성에 대한 오해

Sep 26, 2020 ·3분 ·admin · 4,066
대물림은 어느 선까지 공정한가?
공정성에 대한 오해
조국과 추미애 신드롬으로 나라가 들끓고 있다. 조국과 추미애 건은 현 정부가 내세운 정치이념인 “기회가 공평하고, 과정은 투명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약속을 무참하게 짖밟는 대표적 사례로 등장했다.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현 정권의 정당성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전두환 시절 <공정사회>의 기치를 정치이념으로 내세웠지만 아무도 이 약속을 믿지 못했고 결국 불신은 정책의 효과성을 거두어야 살아남은 전두환 정부를 강압적 폭압으로 통치하는 정부로 전락시켰다.
정당성의 위기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아무리 효과적인 정책이 나와도 국민들은 이 정책이 자신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태가 해결되지 못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촛불정권으로 탄생한 현정부도 전두환 파쇼정치와 비슷한 운명에 처할 수 있다.
왜 이런 정당성 위기에 봉착했을까?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공정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공정성에 대해 미시적으로 나무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숲을 놓치고 있다.
조국사태나 추미애사태가 제기하는 공정성은 이런 미시적 공정성을 넘어서 시간의 계열을 포함해 통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실타래가 어디에서 꼬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슈의 핵심은 부모가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식에게 넘겨주는 것이 어느 선까지가 공정한 것인가이다. 사실 대단한 부모 밑에 자식으로 태어난 것은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이다. 어떤 부모 밑에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신이 던져준 주사위가 그렇게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엄마와 아빠가 만날 확률은 2.2조 분의 1, 아빠의 1억 마리 정자 중 한 마리와 엄마의 난자 한 마리가 만날 확률을 약 1억 분의 1로 보면 내가 태어날 확률은 로또 1등 당첨 확률의 약 28조 배이다. 선대까지 올라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만날 확율까지 계산하면 계산이 불가능하다.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난 자식들은 로또보다 더한 신이 던진 주사위 복권에 당첨된 행운아들이다. 이런 행운을 타고 나지 못한 젊은이들은 세상이 공정하지 못함에 누구보다 예민해 있을 것이고 최근의 일련의 사건들이 역시 세상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자신들이 품었던 가정을 확증하는 건으로 작용해 결국 분노의 불을 지핀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어떤 자식이 의사가 되고 변호사될 수 있는 것도 결국 신이 던져준 주사위에 의해서 대부분이 결정된 것이다. 본인의 노력도 요구되지만 그 정도의 지능과 자격증을 얻기 위한 재력이 뒷받침되는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는 행운이 없었다면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의 개연성은 높지 않다. 문제는 이런 신의 주사위를 외면하고 자신이 조금 보탠 노력의 댓가로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된 것을 마치 다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것처럼 소유권을 주장할 때 생기기 시작한다. 이런 부모와 자식관계에 부모나 자식이나 과도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이것에 과도하게 Rent Seeking하는 삶에 익숙해지면 행운을 걸머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는 행운조차도 뺏는 형국인 조국이나 추미애 가족과 같은 사건으로 불거진다.
아쉽게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기회의 공정성이나 절차의 공정성으로 달성될 수 없다. 신의 주사위로 행운을 걸머진 사회의 엘리트들이 자신의 행운에 대해서 감사하고 이 감사하는 마음을 행운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불운에 대해 배려하고 이들에게 기회를 양보하고 이들이 가진 고통을 같이 풀어가려는 긍휼감으로 되갚으려는 생각을 복원할 때 기회의 공정성이나 절차의 공정성에 관련된 제도도 제대로 작동된다. 정의의 주춧돌은 공정성이 아니라 긍휼감이다.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조차도 아무리 노력해도 행운에 다가서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행에 대한 최소한의 긍휼감이 없다면 정권이 이야기하는 공정성이나 정의는 물건너간 일이다. 공공장소에서는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는 자신의 자식을 위해 하나라도 더 챙기는 정의감 없는 정치가가 겪는 말로를 대한민국의 소시민들이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 진행된 의료파업에 대해 일반 소시민들은 아무 감흥이 없는 이유를 의사들이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정의에 대한 경계를 나 자신에 대한 문제에서 나의 대물림의 문제까지 확장시켜 해석하지 못하면 정의의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고 대응하는 꼴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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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 Jeongkoo Yoon
About the author

Jeongkoo Yoon · 윤정구

Professor of Management at Ewha Womans University's School of Business. Writing on natural learning, double-loop reflection, and the sociology of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