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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시대 소통의 본질
초연결시대 민주화된 소통의 본질은?
컨텐츠를 넘어서라
네트워크 사회의 효과적 소통의 본질은 좋은 컨텐츠였다. 하지만 초연결시대 뛰어난 소통의 비밀은 컨텐츠를 넘어서 맥락을 창출하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소통의 본질을 해부해보자.
네트워크 시대의 특징은 모든 존재하는 것이 다 연결된 것이 아닌 시대이다. 네트워크 상에서 연결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소위 구멍이 존재한다. Burt란 사회학자가 구조적 구멍(structural hole)이라고 명명했다. 네트워크 시대에 힘께나 쓰는 사람들은 혈연, 학연, 지연 등의 연줄을 통해 이 구멍을 연결해줄 수 있는 브로커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구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구조적 구멍 때문에 다른 세계에 돌아다니는 중요한 정보에 대한 콘텐츠를 놓쳐서 손해를 보는 사람들에게 이 콘텐츠를 날라다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소통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은 구조적 구멍이 가져다주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이용해서 권력의 기반을 형성했다. 콘텐츠가 중시되는 사회를 사람들은 정보화 사회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이때 힘을 발휘하던 소통기관들은 신문 방송사, 정부, 기업 등 자신의 컨텐츠의 우위를 권력과 돈으로 청중들에게 밀어내기할 수 있는 주체들이었다. 이들은 정보의 비대칭성을 기반으로 컨텐츠를 만들어 우매한 사람들에게 떠먹여주는 방식으로 수직적 소통을 해왔다. 한 마디로 이들이 소통에서 힘을 발휘한 것은 정보의 비대칭성을 무기로 한 고급정보에 대한 컨텐츠였다.
초연결시대는 구조적 구멍이 사라진 시대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이 연결되어 있고 각자는 CCTV를 달고 있다. 여기서 녹화된 컨텐츠는 자유롭게 공유된다. 초연결사회는 모든 사람들은 SNS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컨텐츠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CCTV 녹화자를 넘어 모두가 PD이자 기자이다. 소통이 민주화된 세상에 도달한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 정부기관들은 아직 이런 세상의 도래를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컨텐츠를 일방적으로 밀어내기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밀어내기 방식의 수직적 소통을 갑질이라고 생각한다. 공영방송이나 민간방송, 기성 신문들이 소통이 민주화된 시대의 도래를 이해하지 못해 위기에 처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기자이고 PD인 시대에 어떤 공영방송도 유튜브같은 플랫폼 매체의 영향력을 넘어서지 못한다.
소통이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소통이 어떻게 이뤄질까?
아래 그림은 언어철학자 비트겐스타인이 만들어낸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토끼라고 주장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오리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만 다음과 같이 상상해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갑이라는 사람은 토끼나라에서 왔다고 가정해보자. 도끼나라에서 오리를 본 적이 없다. 대신 을이라는 사람은 오리나라에서 온 사람이다. 이 사람은 토끼를 본적이 없다.
이 두 사람이 지금 이 그림을 놓고 이게 무엇인지 상대에게 소통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고 상상해보자. 토끼나라에서 온 사람은 토끼라고 끝까지 주장할 것이고 오리나라에서 온 사람은 끝까지 오리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소통은 한 사람이 포기하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다. 해결될 수 없음에도 해결하기 위해서 결국 소통 장면에 개입되는 것이 파워이다. 힘이 썬 사람이 상대를 제압하고 상대를 자기가 주장하는 content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일상의 소통방식이나 일반 리더들이 소통하는 방식은 대부분이 힘이 쎈 사람이 자신의 내용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갑질이나 꼰데질의 소통 방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에게 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이다. 즉 이들에는 파워가 소통의 본질이다.
토끼나라에서 온 사람이 토끼라는 내용을 주장하고 오리나라에서 온 사람이 오리라고 주장하면 이 둘의 토끼나 오리는 다 컨텐트 (content)인 것이다. 컨텐트란 것은 자신의 정신모형 컨테이너 container 혹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다. 원래 content의 어원은 내용물 contain이다. 전통매체들이 소통에 실패하는 이유는 content 중심으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대에게 힘의 우위를 이용해서 자신의 content를 받아들이게 꼰데질하는 것을 소통이라고 생각해왔다.
초연결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content의 text를 상대의 content의 text 속에 씨줄과 날줄로 끼워넣어 context를 만들어냈을 때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올바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구성원들 마음 속에 이 내용을 끼워넣어 이들이 자신의 text와 결합해 context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소통이 되지 않는다. 초연결시대의 진정한 소통은 자신의 스토리의 컨텐트를 다른 사람의 머리 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기자가되고 PD가 되어 서로의 마음의 북을 울려가며 context를 진화시키는 행동이다.
방탄소년단이 전 세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소통에 성공한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컨텐츠 유통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초연결시대에 맞는 맥락적 소통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젊은이들이 고통스러하고 고민하는 이들의 삶의 스토리의 Text를 이해하고 여기에 자신들의 스토리의 Text를 성공적으로 끼워넣은 것이다.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들은 청소년들은 자신의 기존 삶의 스토리의 text가 한 차원 더 높은 차원에서 context로 진화되는 각성체험을 한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뜰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청소년들에게 각성체험을 주는 더 높은 차원의 Context를 만들어 울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적 소통을 위해 전통적 매체가 아닌 초연결시대의 민주화된 소통의 매체에 맞춰서 소통의 방식을 진화시켰기 때문이다.
기존의 상황이라는 씨줄에 자신 삶의 Text라는 날줄을 엮어서 새로운 Context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냥 content의 소비자이지 시대에 맞는 소통자는 아니다. 맥락적 소통을 통해 자신나름의 맥락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마음놓고 자유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은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서 볼 수 없는 나만의 차별적 삶의 스토리와 이 스토리가 뿌리내리는 기존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소통은 그냥 뜬구름잡는 신변잡기로 끝난다. 대부분의 소통노력이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것은 이런 맥락적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