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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침반은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 근원적 자신감의 원리

Oct 11, 2021 ·5분 ·admin · 5,822
내 나침반은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
근원적 자신감의 원리
민영규 시인은 나침반(지남철)이 죽어 있는지 살아 있는지에 대해 처음으로 질문을 던진 탁월한 철학자이자 시인이다. 민영규는 독실한 크리스찬이다. 본인이 직접 예루살렘을 성지순례해가며 이 시를 완성했다. 자신이 믿고 있던 나침반이 죽은 나침반이었다는 성찰 때문이다. 스스로가 독실하다고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 중 죽은 나침반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영규 시인은 살아 있는 나침반인지 죽은 나침반인지를 구분지우는 것은 믿음을 통해 만들어지는 떨림이라고 설명한다.
변화가 상수가 되고 변화의 내용도 코비드 19처럼 핵폭탄 같은 변화가 시시각각으로 내려오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리더나 기업의 본질은 길 잃음이다.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찾는 도구가 살아 있는 나침반이다. 나침반을 통해 길잃은 지점을 확인해낼 수 있고 여행을 위한 지도를 그려낼 수 있다. 살아 있는 나침반만 가지고 있다면 시대적 본질인 길 잃음에 대해 걱정하고 우려하고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 길을 잃으면 다시 나침반을 꺼내 지점을 확인하고 다시 지도를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침반은 기독교인 뿐 아니라 지금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리더와 기업들에게 근원적 자신감(Unconditional Confidence)의 기반이다.
나침반만 있다고 모두 근원적 자신감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서 떨리는 나침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근원적 자신감이 생성된다.
나침반이 세상이 바뀌어도 떨림을 유지하는 원리는 진성리더십의 골격인 자기이해과 자기규율에 의해서 설명된다.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음이라는 자기이해와 이 자기이해에 근거해서 삶 속에서 자신에 대한 돌봄인 자기규율이 제대로 작동할 때만 나침반은 세상이 바뀌어도 떨림을 유지한다.
자기이해란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의 여행자로서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길을 잃었을 때마다 이 정체성의 거울을 꺼내서 자신을 확인한다. 정체성의 거울을 이용해서 자신을 반성하고 온전한 여행자로서 미흡한 지점을 알아내는 것이 자기이해이다. 이 온전하지 못함을 자신의 삶 속에서 극복해내 자신만의 정체성 근육을 완성하는 것이 자기돌봄이다. 자기이해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 완성되고 자기돌봄은 자기규율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나침반이 떨림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자기이해와 자기규율 사이의 디커플링 즉 둘 사이의 분절이 생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으로 주일에는 기도도 열심히 하고 회개도 해가며 자기이해를 하지만 월요일이 되면 세속적인 사람으로 정체성 스위치가 전환되는 것을 자신도 모른다. 기독교인이라는 믿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근육을 형성하지 못한 자기규율의 문제다. 주일 기도와 회개를 통해 만들어낸 자기이해가 월요일의 자기규율로 연결되지 못하니 주 중에는 결국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자기이해도 사라진 것이다. 다시 주일에 자기이해로 스위치를 돌리지만 삶은 시지프스적 돌굴리기로 전락한다.
자기이해가 없이 자기규율만 존재하는 믿음은 부러질 수 밖에 없는 믿음이다. 성경의 욥이 겪는 고난은 자기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자기규제만 강할 때 겪는 고난이다. 욥은 어떤 기독교인보다 강한 자기규제를 훈련한 사람이다. 마지막 순간에는 자기규제를 통해 단련한 자신 믿음이 부러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감지하고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자기이해는 강도만 강조하는 믿음에 탄성을 가해 강하지만 부러지지 않는 용수철 같은 믿음을 완성한다. 극단적으로 바뀐 환경에서도 떨림을 유지하는 용수철이 되기 위해서는 냉온탕을 거치는 풀무질을 통해 철을 무쇠로 만드는 탄소가 어느 수준까지 제거되어야 한다.
자기이해와 자기규율을 모두 갖춘 신실한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한 온전함이 실현된다면 욥기 7장 8절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자기규율은 충분히 되어 있으나 자기이해가 되어 있지 못한 욥의 문제는 일반신도가 아니라 종종 목회자들이 겪는 디커플링이기도 하다. 실제 규율된 삶을 살고 있고 성경말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자기이해도 있다고 자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이해는 성경을 지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기이해는 성경 말씀을 일인칭인 자신의 현재 맥락으로 독해해내는 문해력을 의미한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과거의 죽은 이해가 아니라 세상이 달라지면 변화한 세상에 맞춰 말씀을 다시 해석해내고 이 해석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위치 시키는 문해력이 있어야 자기이해가 가능하다. 자신이 과거에 해석한 또한 과거에는 작동했지만 지금은 맥락에서 멀어진 성경 해석에 자신을 고착시킨 사람은 자기이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다. 성경 말씀이라는 이유로 과거 믿음에 자신을 가둔 사람일 뿐이다. 젊었을 때는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교회를 부흥시킨 목회자가 세월이 흘러서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으로 전락하는 것도 다 하나님이 욥에게 경고한 문제의 핵심이다.
나침반이 떨림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의 전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목적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욥정도의 자기규제를 요구하지는 않으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믿음이 없다면 나침반을 구성할 수 없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구성된 나침반이 떨리는지는 자기이해의 문제다.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주고 이 존재를 실현시키는 일을 도와줄 파트너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자기이해의 감옥에 갇힌 경우다. 떨림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자신의 의식을 깨워 정신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는 경우를 의미한다.
세상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문해력을 증신시켜 자신과 파트너에게 스파크를 일으킨다면 나침반은 여전히 살아있다.
내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나침반은 정말 살아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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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 Jeongkoo Yoon
About the author

Jeongkoo Yoon · 윤정구

Professor of Management at Ewha Womans University's School of Business. Writing on natural learning, double-loop reflection, and the sociology of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