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삼의 시간과 제삼의 공간이 만든 태피스트리

제삼의 시간과 제삼의 공간이 만든 태피스트리
나만의 쿼렌시아(Querencia)
스페인의 거친 투우장(Plaza de toros)에는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소란 속에서도 기묘한 정적이 흐르는 성소(Sanctuary)가 존재한다. 상처 입고 지친 소가 본능적으로 찾아드는 곳, 바로 ‘쿼렌시아(Querencia)’다. 소는 이 작은 모퉁이에 발을 붙이는 순간, 격렬한 숨을 고르며 에너지를 복원하고 투우사의 공격에 맞설 마지막 저항의 힘을 길러낸다.
쿼렌시아는 단순히 물리적인 대피소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복원하는 회복의 성소다. 인간의 삶 역시 투우장과 다르지 않다. 세상이 우리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지 않는다면, 아픔에 대한 치유의 성소인 쿼렌시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인류의 역사는 거기서 멈춰섰을 것이다. 가혹한 삶의 투우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에게 주었던 자기 치유의 거점이 지금의 문명과 문화를 만들었다. 개인도 마찬가지로 나를 둘러싼 문명은 삶과 죽음 사이에 제삼의 존재인 쿼렌시아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회와 개인의 문명을 만든 숨겨진 원동력인 쿼롄시아를 이해할 때 주목해야 할 점은 쿼렌시아는 단순한 치유와 회복의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쿼렌시아는 나만의 주체적인 ‘공간’과 나만의 주체적인 ‘시간’이 촘촘하게 맞물려 짜인, 나만의 시공간이 만든 직조물이다. 세상의 소음이 차단된 나만의 공간에,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는 나만의 시간이 스며들 때 비로소 쿼렌시아라는 치유의 성소가 완성된다.
인류 역사 속 쿼렌시아의 원형들:
인간은 예로부터 삶에서 얻은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 자신만의 ‘제삼의 공간이자 제삼의 시간’을 쿼렌시아의 원형으로 삼아왔다. 루소는 인류가 이런 치유의 시간과 치유의 공간을 만들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은 문명을 만들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사울왕의 광기 어린 추적을 피해 다윗이 숨어들었던 ‘아둘람 굴’도 단순한 피신처를 넘어 상처받은 영혼들이 모여 내일을 도모했던 존재적 쿼렌시아였다. 느헤미아가 폐르시아의 노예로 잡혀 갔다 복귀한 이스라엘 포로를 위해 복원한 성벽도 귀환의 상처와 피로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오아시스이자 쿼렌시아였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속 ‘햄릿’이 고뇌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유배시켰던 사색의 시공간 역시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정신적 요새였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 쿼렌시아의 원형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집안 한구석에 정성스럽게 꾸민 나만의 서재, 가정을 벗어나 도시의 소음 속에서 익명성을 보장받는 스타벅스의 구석 자리, 어떤 조건이나 계산 없이 존재 자체로 용인받으며 무한한 수다를 떨 수 있는 안전한 친구와의 만남, 그리고 일상을 과감히 벗어나는 여행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가혹한 세상으로부터 얻은 내면의 균형을 되찾기 위한 제삼의 시공간이다.
제삼의 시공간:
많은 이들이 쿼렌시아를 단순히 예쁜 인테리어나 아늑한 카페 같은 ‘공간’으로만 인식한다. 그러나 공간은 쿼렌시아의 외형을 이루는 ‘날줄’에 불과하다. 쿼렌시아에 진짜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씨줄, 즉 ‘제삼의 시간’이다. 타인이 규정한 속도와 사회적 의무로 가득 찬 매끈한 일상의 시간에 균열을 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공간에 머물지라도 그곳은 진정한 성소가 될 수 없다.
시간의 본질에 천착하여 일상의 기계적 시간에 균열을 내고자 했던 철학자들의 사유는 쿼렌시아의 씨줄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적 시간에 균열을 내지 못하고 시계 바늘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은 결국 본래성을 잃고 죽음으로 치닫는 존재(Sein zum Tode)라고 보았다. 그는 죽음에 빼앗길 무의미한 시간을 되찾기 위해, ‘죽음 앞에 미리가보는 경험(Vorlaufen in den Tod)’을 제안한다. 내 삶의 유한성을 절박하게 자각함으로써 일상의 가짜 시간에 균열을 내고, 비로소 내 삶을 온전히 되찾는 ‘제삼의 시간’을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에게는 지속(Durée)으로 만든 체험된 시간이 제삼의 시간이다. 베르그송은 과학적이고 계량화된 시계의 크로노스 시간에 균열을 만들어 인간이 내면으로 직접 느끼고 살아가는 카이로스 시간인 ‘지속(Durée)’이라는 제삼의 시간을 찾아내는 시간의 탈주를 강조했다. 그는 삶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정신적 밀알을 찾고, 그 밀알이 내면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만드는 체험된 시간이야말로 삶의 창조적 진화(Évolution créatrice)를 이끄는 제삼의 시간이라고 보았다.
들뢰즈(Gilles Deleuze)가 제시한 차이와 반복의 시간도 제삼의 시간균열을 만드는 지렛대다. 들뢰즈는 사회가 시스템의 편의를 위해 매끄럽고 평탄하게 닦아놓은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뚫고 나아가,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의 균열을 만드는 삶을 예찬했다. 남들이 정해놓은 반복의 궤도를 이탈하여 시간과 공간의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삶만이, 살아 움직이는 진정한 존재적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워라밸’의 허구성과 7·4제의 좌절: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현대인들이 정답처럼 맹신하는 ‘워크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 워라밸)’는 철저히 허구적인 개념이다. 워라밸은 이미 남들이 정해 놓은 24시간이라는 물리적 시간의 틀 안에서 직장과 가정의 비율을 기계적으로 배분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인간을 시간과 공간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조가 짜놓은 시공간의 팽팽한 싸움터 속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덫이다.
나아가 고(故)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신경영 선언과 함께 도입했던 ‘7·4제(7시 출근, 4시 퇴근)’ 이후의 퇴근 시간 역시, 조직에 매여 있던 개인에게 저녁 이후의 삶을 돌려줌으로써 스스로를 복원할 수 있도록 설계된 거대한 제도적 쿼렌시아의 원형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7.4제는 시간의 쇠사슬에 균열을 내고, 삼성인에게 자신만의 ‘제삼의 시간’을 찾아주기 위한 탁월하고 파격적인 시도였다. 오후 4시 이후의 자유를 통해 주체적 삶의 쿼렌시아를 구축하라는 거대한 화두였던 셈이다. 불행하게도 이 혁신은 실패로 끝났다. 경영진조차 제삼의 시간에 대한 깊은 철학적 이해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오랜 세월 직장과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오직 ‘먹고살기(생존)’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오후 4시 이후에 주어진 자유는 너무나 생소하고 두려운 공백이었다. 시간에 균열을 내 본 적 없는 이들은 늘어난 시간을 어떻게 쿼렌시아로 직조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여행은 쿼렌시아의 실험실:
이제 우리는 사회가 매끄럽게 닦아놓은 타율적인 시간과 공간의 궤도에 과감히 균열을 내야 한다. 나만의 제삼의 시간과 제삼의 공간을 결합하여 쿼렌시아를 창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시공간의 노예로 저당 잡혀 살다가 그저 장렬하게 마모되어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그 균열의 시작으로 홀연히 떠나는 여행을 제안한다.
여행만큼 제삼의 시간과 공간인 쿼렌시아를 제대로 실험할 수 있는 무대는 없다. 여행은 내가 안주하던 익숙한 공간적 배경을 지워버리고, 내가 쫓기던 일상의 시간 전개를 멈추게 만든다. 완전히 다른 시공간 속에 스스로를 거칠게 던져넣는 이 최고의 ‘상상적 실험’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중요한 각성 체험을 얻게 된다. 아, 내가 그동안 타인이 짜놓은 시간과 공간의 노예로 살았구나.
비싼 여행이 아니라도 홀연히 떠나서 일상의 매끄러운 시공간에 거친 균열을 내보자. 그 균열의 틈새로 나만의 공간(날줄)과 나만의 시간(씨줄)이 태피스트리로 직조될 때, 상처 가득한 삶을 품어줄 나만의 시간과 나만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는 진짜 쿼렌시아의 비밀문이 열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