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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근원적 혁신 어디에서 시작하나?
대한민국의 근원적 혁신
어디에서 시작하나?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 사회, 경제, 종교, 가정, 교육, 과학 모든 영역에서 극단으로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다. 니체가 오래 전에 진단했듯이 사람들이 혼돈 속에서 미친 짓에 몰두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의 이미 존재목적을 잃고 탈로했음에도 탈로한 길을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고 치닫고 있을 때이다. 탈로한 기차의 종착역은 파국이다.
우리 연구팀(코넬 대학의 Lawler,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 Thye, 이화여대의 Yoon)은 사회 과학적으로 이런 무질서는 세상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느끼는 피할 수 없는 혼돈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병리현상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한다. 단지 이런 변화를 통한 무질서가 주어졌을 때 의미 있는 질서를 새롭게 조직하는 원리인 거버넌스를 혁신할 수 있는지에 따라 변화와 혼돈이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몰락의 전조도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책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Order on the Edge of Chaos>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은 혼돈과 무질서를 극복할 수 있는지도 시대에 맞는 거버넌스의 옷을 입고 있는지의 문제다. 이런 거버넌스 혁신이 전제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시대에 역행하는 거버넌스의 옷을 입고 있다면 어떤 특효약을 만들어도 다 무질서의 고통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반창고나 진통제일 뿐이다. 의미 있는 질서를 만들어낼 수 없다.
신자유주의가 경기를 이끌던 20세기에는 국가, 기업,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는 피라미드 거버넌스 형태였다. 리더는 피라미드의 정점을 차지하고 리더가 답으로 생각하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대리인을 고용하고 대리인을 팔로우어로 잘 훈련시켜 정점에 있는 리더에게 편안하고 의미 있는 질서를 만들고 유지해왔다. 이런 피라미드 거버넌스는 소수의 혜택을 받은 사람과 다수의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양극화의 단초가 되었다.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은 기업에 돈을 댄 자본가인 주주들이다. 이들 주주는 자신들의 이득인 이윤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경영자와 종업원들을 대리인으로 고용하여 주인인 자신들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일을 시켰다. 주인과 대리인 사이에 변심에서 생기는 문제(moral hazard)는 평가와 경제적 인센티브를 동원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회사의 지배구조는 20세기의 지배구조 형태인 피라미드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21세기가 시작되자 리더와 주주 중심의 피라미드 거버넌스가 이끄는 경기의 거품이 꺼지고 장기적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L자 불경기가 뉴노멀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디지털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하는 초뷰카 사회에 도달했다. AGI와 로봇기술이 상용화되어 지금까지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해야 하는 전문가들의 해고되고 전문성이 민주화되는 초유의 사태를 목격하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맞춰 등장한 새로운 거버넌스가 플랫폼 거버넌스다. 플랫폼 거버넌스에서는 기업, 국가, 정부, 시민단체 모든 시스템은 디지털 플랫폼을 이용해 구성원이 주인공으로 뛸 수 있는 운동장을 제공한다. 플랫폼 거버넌스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성숙한 민주화를 구성원 개개인을 삶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을 때 실현된다고 생각한다. 리더는 피라미드 정점에 서서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플랫폼의 역피라미드 제일 밑에서 스튜어드십(Stewardship)을 발휘해가며 집사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플랫폼 운동장의 울타리가 무너졌을 때 고쳐주기도 하고, 어떤 구성원들이 운동장에 정치적 토굴을 파놓으면 이것을 메꾼다. 이들은 조직의 존재목적에 동의하고 헌신하는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공유된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 놀아가며 주인으로 생생지락할 수 있게 돕는다. 이들 리더는 구성원이 운동장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뛰어 놀아가며 서로 협업이 가능하도록 미진한 기술적 역량을 레벨링 시키는 일도 돕는다. 플랫폼 거버넌스에서는 구성원이 주인공이고 리더이다. 리더는 서번트 역할을 수행하거나 치어리더다.
이런 플랫폼 거버넌스를 조직하는 드라이버는 자신의 욕구를 극대화 시킨 리더의 생각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약속한 존재목적이다. 존재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리더와 구성원은 사명과 가치의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운동장을 만들어 낸다. 각자 구성원은 존재목적의 약속을 실현하는 일에 협업하는 Fellow들이다. 이런 21세기 거버넌스의 완결된 형태가 그림에 설명되어 있듯이 다이어먼드 거버넌스다.
이런 21세기 거버넌스의 출현을 염두에 둘 때 21세기 대한민국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답도 여기에 있다. 플랫폼 가버넌스의 드라이버인 대한민국의 존재목적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국조(國祖) 단군(檀君)의 건국이념이기도 하고 헙법의 전문도 이 홍익인간의 존재목적을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홍익인간은 대한민국이 왜 국가로서 존재해야 하는지의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홍익인간은 남들을 이롭게 하는 것을 넘어서 남들의 성공을 돕는 인간을 의미한다. 21세기 홍익인간의 이념은 “남들의 성공을 돕는 일에 있어서 크게 성공한다”라는 의미다.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각자가 가진 것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새로운 시스템으로 등장한 “플랫폼”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대한민국이 지금의 혼돈과 무질서를 극복하고 세계 시민들이 존경하는 시민국가로 태어나는 것은 홍익인간이라는 존재목적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각 시민들이 주인으로 세워져서 이들이 서로 협업해가며 생생지락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일이다. 지금의 리더가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리더만 바라보는 20세기의 피라미드 거버넌스를 탈피하고 플랫폼 거버넌스로 혁신해야 한다. 특히 기업가들과 정치가들이 이런 거버넌스의 전환에 성공할 때 대한민국이 명실공히 남들의 성공을 돕는 일에 크게 성공하는 선진 시민국가의 위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유행을 타고 있는 한류에 홍익인간이라는 존재목적이 녹아 있지 못하다면 한류는 그냥 반짝 뜨다가 사라지는 유행이지 국가의 브랜드가 되지 못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조직해주는 것은 경쟁을 넘어서 합심해서 서로의 성공을 돕는 협업이다. K이름이 붙은 많은 유행도 홍익인간이라는 존재목적이 체험으로 녹아 있지 못하다면 그냥 한때의 유행에 불과할 뿐이다.
대한민국이 지금의 혼돈과 무질서의 도가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가, 사회, 종교, 기업의 거버넌스가 피라미드 거버넌스에서 플랫폼 거버넌스로 전환되어야 한다. 소위 리더로 세워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개입을 시작해야 한다. 국가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거버넌스를 혁신하려는 노력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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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 글은 어제 가까운 동료와 같이 기록 다규영화인 <길 위의 김대중>을 보고 미래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거버넌스에 대한 소회와 우려다. 대한민국이 어느 정도 민주화를 달성했다고 믿었지만 시대도 다시 변했고 시대에 맞게 민주주의를 공진화시키는데 실패한 틈을 타고 보수 기득권 카르텔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민주주의를 공진화 시키지 못한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 영화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은 가진 자로부터 가장 큰 핏밥과 고통을 받았지만 일반대중에게는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이념을 넘어선 실용주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의미 있는 해석이다. 파쇼세력이 지속적으로 덧씌운 이념의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하고 실용적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간 내 머리 속에 임의로 편집되었던 민주화의 역사가 바르게 재편집될 수 있었다. 국민에게 사랑 받는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분들은 반드시 보았으면 한다. #길_위의_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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