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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나?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나?
“맑눈광”의 비밀
“센 바람이 불어야 억세고 튼튼한 풀이었음을 알게 되고,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야 충성스러운 신하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당태종도 명재상 소우의 진실한 품성과 능력을 세상의 풍파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 지를 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는 것을 사과하는 내용이다. 그냥 시절 좋을 때는 소우를 그냥 약한 풀이라고 생각했다는 각성이다. 풀도 바람에 줄기가 끊어지는 풀이 있고 바람을 버텨내는 풀이 있다는 것을 태풍이 몰아치기 전에는 몰랐다는 뜻이다.
풍파가 지나간 후에 본질을 이해하는 것을 사후통찰력(hindsight)라고 부른다. 우리 속담에서 사후통찰력은 “사후약방문” 혹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이다.
사후통찰력에 의지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우리는 사건의 전말이 밝혀져야 사건의 본질을 이해한다. 항상 한 발 늦게 깨달은 학습지진아인 셈이다. 더 문제가 되는 학습지진아는 고통스럽게 깨달었어도 또 잊어버리고 매번 사후약방문의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과거에 대한 기억상실증 환자다. 과거에 대한 기억상실증은 치매에 버금가는 무서운 형벌이다.
사후통찰로 뒤늦게 알아차린 사람들은 항상 일이 터지고 나서야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게 나라냐?”
“이게 대통령이냐?” “
이게 국회의원이냐?” “
이게 장관이냐?”
“이게 법이냐?”
“이게 정의냐?”
이 질문들의 공통점은 나라,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법,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를 묻는 질문이다. 처음부터 이런 것의 본질을 드러내는 정의(definition)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일이 끝난 후에 모든 문제의 발단이 정의(definition)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사후약방문으로 깨달은 것이다. 제대로 된 정의(definition)에 관심을 두지 않는 틈을 타서 혹세후민하는 정의로 멋지게 포장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살다가 결국 토사구팽 당했다는 뒤늦은 후회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까지 기다려야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사후약방문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위정자로 나서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 정의(definition)에 대한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국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리더는 어떤 사람인가?”
“국민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많은 질문 중 세 가지 정의에 관한 질문에 초점을 두는 이유는 국가는 리더의 토양이고, 리더는 씨앗이고, 행복은 리더십 씨앗이 나무로 키워 제공할 과실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로 좌표가 찍혀 있지 못한다면 이들을 연결해서 그려낸 리더의 정신모형 지도도 세상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지도가 된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지도를 가지고 국가를 이끄는 리더 밑에 사는 구성원에게 닥칠 불행은 너무 자명한 것이다.
위정자를 선출하기 위해 수 많은 질문을 던졌어도 이 세 가지 본질적 정의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못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서로 일관된 답을 가진 사람이 리더로서 자신에게 하는 말과 구성원에게 하는 말이 같은 상태인 진정성에 도달한 리더다. 또한 어려운 일에 닥쳤을 때 처음의 정의를 유지해가며 문제를 풀려고 측은하게 시도한 행적이 있는지가 리더 진정성의 척도다.
문제를 일으킨 리더의 과거 행적을 사후약방문이라도 조사해보면 이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했음을 금방 찾아낼 것이다. 법전을 달달 외우는 현란한 능력에 속아서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믿고 이들에게 한번도 본질적 질문을 던지지 못했던 것이다.
고사에 안광지배철(眼光紙背徹)이라는 말이 있다. 눈빛이 책의 종이를 뚫고 의미를 파악한다는 뜻이다. 책에 기술된 내용 밑에 흐르는 일관성이나 비일관성을 꿰뚫어보는 통찰력(메타인지능력) 있다는 의미다. 모든 사람들은 보는 눈은 있으나 안광(통찰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안광은 자신과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에 훈련된 사람들만 구사할 수 있다. 이런 안광을 구사하는 사람들을 한 칸 더 깊이 들어 파악해보면 이들은 자신과 세상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인 존재목적에 대한 자신만의 선하고 신박한 정의를 가진 사람들이다.
세상에 제대로 된 정의(definition)를 공급하는 존재이유를 각성한 사람들이 안광지배철(眼光紙背徹)을 넘어서 세상의 배후를 꿰뚫어보는 안광세배철 (眼光世背徹)의 현자가 된다.
많이 회화화 되었지만 이런 안광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맑눈광이라고 부른다. 눈에 힘을 줘가며 주위를 면밀히 살핀다고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맑눈광(맑은 눈의 광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초월하는 선한 존재목적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만 세상은 자신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들에 의해 제대로 된 정의가 제공되고 사람들은 이들을 진정한 맑눈광이라고 부른다.
자신 스스로 선한 존재의 본질에 대해 알고 있어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의 정의에 대해 촌철살인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맑눈광이다. 세상에 맑눈광이 사라질 때 희극은 먼저 나서서 희화화 한다. 코메디에서 먼저 등장했다는 것은 우리 주변에는 더 이상 맑눈광이 없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맑눈광이 되어 아직 제대로 된 정의를 도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고통스런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질문을 던져주자. 서로에게 정의(defintion)를 되묻고 피드백해 당분간은 사후약방문하는 고통의 쳇바퀴에서 벗어나보자.
아직 자신의 존재목적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번지름한 겉모습만 보고 리더로 세운 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의 발단이었다. 자신에 대한 욕심과 허세로 가득한 유사 정치인인 위정자(僞政者)를 진짜 정치인인 위정자(爲政者)로부터 구분하는 안목이 문제였다.
존재목적을 분명히 해서 맑눈광의 안광을 획득하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사후약방문 처방에서 해방된 사람이 되자. 진실로 과거에서 해방된 사람으로 살아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