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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서다! 고통이 가르쳐 준 통찰

Sep 21, 2025 ·7분 ·jkyoon · 569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서다!
고통이 가르쳐 준 통찰
25.6.22
수년 전 심장혈관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끝내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을 때다. 옆에 누워있던 환자가 갑자기 심장 발짝을 일으켜 실려 나갔다. 이 환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한밤중에 인공심장이 멈춰서 응급조치를 받고 경과를 보기 위해 중환자실에 들어온 환자도 있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해 동물처럼 울부짖는 환자도 있었다. 중환자실은 죽음의 경계와 삶의 경계를 헤매는 사람들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공간이었다. 중환자실이라는 공간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는 자의적이었다. 처음으로 삶과 죽음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각성했다.
죽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경계는 무엇인가?
여전히 자의적이지만 본인은 두 가지 기준을 적용한다. 첫째, 죽음은 의식이 끊어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둘째, 설사 고통을 느껴도 행동으로 개입이 불가능한 상태다. 실제 죽은 사람에게 죽음은 육체적 고통이 사라진 평온함일 수도 있고, 산 사람에게 죽음은 모든 시도가 무의미해지는 절망일 수도 있다.
살면서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종종 죽음과 다름없는 유사 죽음(Psuedo Death) 상태를 종종 체험한다는 점이다. 유사죽음이란 살아 있으면서도 고통을 인지하지 못하고 따라서 고통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조기에 유사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진짜 죽음을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는 고통이 있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아픔이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단서가 숨겨져 있다. 우리는 고통에 개입해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희열을 느끼고 성장한다. 열정(Passion)의 어원도 고통을 근원적 수준에서 해결했을 때 느끼는 희열이다. 우리는 열정의 원천인 고통을 무시하고 결과만 보고 열정을 단순히 희열이라고 해석한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이상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누적될 경우 꼬임(Complex)를 뜻하는 컴플랙스가 발생하고 컴플랙스가 심해질 경우 에너지의 순환을 막는 결석이 생긴다. 일반적으로 에너지 순환을 막는 결석이 고통의 원인이다.
이런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결석과 결석을 만든 더 근원적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근원적 수준에서 해결하는데 익숙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에 거적을 덮어 놓고 감추고 고통이 심각할 지경에는 진통제를 처방하는데 더 익숙하다. 고통에 대한 심리적 처방은 꼬임인 컴플랙스를 위인화한 성인아이라는 기제를 통해서다. 우리는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꼬임을 경험했고 꼬임을 해결하기 위해 성인아이를 만든다. 성인아이는 문제를 풀지 못해 모든 비난을 덮어쓰고 숨겨져 있다. 성인아이를 자신과 분리시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 성인아이에게 덮어 씌우는 방식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성인아이를 통해 만들어낸 방호기제는 심리적 환각일 뿐이지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문제와 그로 인한 고통을 감추는 데 익숙하다. 자신의 내면에 ‘성인 아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고, 이 아이에게 모든 고통을 전가시키며 자신이 마주하는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 아닌 것처럼 살아간다. 이렇게 생성된 성인 아이는 우리 몸속의 가시와 같다. 자신이 술에 만취해 있거나 무슨 이유로 자아가 통제불능이 되었을 때 나타나 자아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감옥에 가두어지거나 거적이 덮여진 상태로 통제된다. 성인아이는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투사하거나 외부의 문제로 돌려 고통을 돌려 막는 도구다. 문제는 성인아이가 고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한다고 고통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해결된다는 잘못된 환각일 뿐이다. 성인아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많은 유전자 복권을 타고 태어났어도 어느 순간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멈춘다.
성인아이는 자신이 해결해야 할 고통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는 유사 죽음의 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고통에 무감해지니, 당연히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주도적인 행동으로 개입하지도 못한다. 숨은 쉬고 있지만 우리를 마치 죽은 식물인간처럼 만든다. 우리의 내면에 큰 성인아이가 있다는 것은 숨 쉬고 있지만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다.
고통은 삶의 일부이자, 동시에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신호이며, 그 고통을 통해 우리는 변화하고 성장할 기회를 얻는다. 고통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를 죽음과 삶의 모호한 경계에 가두는 행위다.
고통을 성인아이를 통해 해결하지 않고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자기긍휼(Self Compassion)이다. 자기긍휼을 통해 성인아이가 휘두르던 투사의 가시가 무력화되고 녹여지면 삶의 기적이 다시 찾아온다. 성인아이가 고통으로 내지르던 자기방호의 시끄러움이 잠잠해지고 내면도 고요해진다. 내면이 고요해지면 드디어 밖으로부터의 영혼의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무의식 속에서 성인아이와 행동하는 자아가 싸우고 있을 때는 밖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고 영혼을 일깨우는 종소리가 들려도 들을 방법도 없고 여유도 없다.
우리가 어느 순간 성장이 멈춰졌다고 느끼는 순간은 아마도 의식하지 못하는 성인아이가 커진 상태이다. 성인아이가 감당하는 엄중한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직면하고 받아들이고 성인아이와 화해하는 용기가 성인아이의 가시를 녹이는 사랑의 에너지가 된다. 성인아이와 화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큰 유전자 복권을 타고 태어났어도 자신을 통한 성장과 번성은 물건너간 일이다. 유전자 복권과 성인아이는 서로 공모해 자신을 점점 더 괴물로 변형시킬 뿐이다.
성장과 번성이 멈춘 우리를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 우리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고통을 직면하고, 그 고통의 근원을 탐색하며, 주도적으로 개입하여 근원적 수준에서 해결하려는 자기긍휼을 회복해야 한다. 고통은 남들이 대신 아파할 수 없는 문제다. 자기긍휼이 있는 사람들만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분별해서 책임지고 자신 삶의 주인으로 세우는 근력을 얻는다. 자기긍휼은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성인 아이를 인지하고, 그 아이가 투사하는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생성된다. 고통을 느끼고 그에 반응하는 것은 살아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생각보다 애매모호하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직면할 수 자기긍휼의 용기가 주체적 삶과 번성을 만든다. 자신이 겪는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용기 있게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근원적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는 통찰과 통찰에 개입해 사는 것을 넘어서 성장과 번성의 에너지를 얻는다.
지금 어떤 고통을 느끼는가?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 고통에 어떻게 근원적으로 개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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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이 글은 어제 (250-6-21 토요일)에 있었던 진성리더십 아카데미 22기 수료식과 노마드 자저전 클럽 7기 수료식에서 도반분들의 발표를 듣고 적은 소회입니다. 진성리더십 아카데미는 자신의 아픔을 안전하게 고백할 수 있는 한방병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노마드 클럽의 일인칭 글쓰기는 자신의 고통과 화해하고 치유해서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다시 세우는 과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창준 진성리더십 아카데미 교장선생님, 유미애 교감선생님, 손미향 노마드 클럽 교장선생님, 최명옥 교감선생님, 몸과 마음으로 헌신하신 세르파 도반님들 모두 고맙습니다. 여러분 덕에 저도 빚을 조금 탕감 받았습니다.
PS 2: 성경에서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 인물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고통을 피하기보다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직면해서 그 고통 속에서 고통에 개입해 얽힌 실마리를 찾아내고 이 얽힌 실타래를 풀어 근원적 변화를 성취한 분들이다. 한 마디로 이들을 고통 속에서 일으켜 세운 것은 자기 아픔을 직면하는 자기긍휼(Self Compassion)이다. 우리는 아픔이 생기면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적을 덮어놓고 모른 척하지만 이 거적 속에서는 구더기가 생겨서 고통은 더 커진다. 자기긍휼은 이 거적을 치우고 고통을 직면하는 용기다.
예수는 십자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함을 통해 죄사함이라는 근원적 변화의 통찰력을 얻었다. 구약에 등장하는 욥도 고통을 피하기보다는 직면함을 통해 하나님이 고통을 통해 창조하려는 세상의 가치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다. 다윗도 사울에게 쫓기는 도피 생활, 자녀의 죽음, 압살롬의 반역 등 다양한 형태의 고통을 겪었지만 한번도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고통의 순간들을 시로 진솔하게 기록했다. 고통을 만든 것이 자신의 죄라는 것을 알았고 시를 통해 내면의 고통과의 화해를 시도했다. 골리앗과 싸움에서 승리하자 내면의 고요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바울도 자신의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 (고린도후서 12:7-10)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이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응답하신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약함과 고통이 오히려 하나님의 강함과 능력을 드러내는 통로였음을 깨닫는다.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고통을 만들어낸 원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다.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실수와 죄를 해결하지 못한 고통이 있음에도 주도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상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유사죽음’이 선고된 상태다. 반대로 죄가 만든 고통을 인정하고 죄를 원인의 수준에서 해결해 ‘산 자’가 되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들의 소망이다.
성경은 고통을 용기 있게 직면해온 사람들의 고통 연대기다. 성경을 대표하는 모든 인물들은 하나님의 직접적 맨토링을 통해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행동의 수준에서 개입함을 통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원히 살아 있는 인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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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 Jeongkoo Yoon
About the author

Jeongkoo Yoon · 윤정구

Professor of Management at Ewha Womans University's School of Business. Writing on natural learning, double-loop reflection, and the sociology of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