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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에 관한 이야기 환대라는 진통제
명의에 관한 이야기
환대라는 진통제
다음은 한 의사 분께서 들려주신 친구 이야기다.
친구는 연로한 시골 의사시다. 시골에서 노인들을 주로 상대하는 이 분은 명의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 이분이 명의인 이유는 환자를 잘 진단해주고 제대로 된 처방을 내려주는 것 이외의 다른 아픈 숨겨진 사연이 있었다. 이분도 연로해서 귀가 잘 안 들렸다. 환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제대로 들을 수 없어서 자신과 비슷한 노인 환자 분이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방문했던 환자분들은 의사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다는 생각에 환자로서 환대를 경험했다. 환대를 경험한 노인들은 최소한의 치료와 처방에도 병이 낫는 경험을 고백했다.
환자는 명의를 만나면 실제 치료를 받지 않아도 낫는 경험을 한다. 통증에 시달려가며 응급실에 실려가는 와중에도 병원에 가까워지면 통증이 완화되는 체험을 한다. 일종의 플래시보 효과다.
예수가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명의라는 소문이 퍼지자 예수 주위에 환자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적을 행하는 명의 예수를 직접 만나서 몇 마디 말을 나누는 따뜻한 환대 체험만으로도 통증이 사라지고 병이 낫는 기적을 고백했다. 예수는 인류가 낳은 최고의 사회적 명의였다.
최근 뇌과학의 발전은 뇌가 인지했지만 기존의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편도체에 의해서 통증에 대한 기억으로 전환된다는 것이 알려졌다. 문제를 지속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편도체는 통증을 피하기 위해서 통증의 소스가 되는 문제를 회피하는 성향을 만든다. 편도체가 최적화시킨 해결책이 방어와 회피본능이다. 회피본능은 문제의 원천을 치료하지 못해 구더기가 생기면 구더기가 무서워 상처와 구더기에 거적을 덮어 놓는 방식이다. 편도체의 의도와는 달리 거적 밑에서 구더기와 상처는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잘난 인간도 신이 아닌 이상 본질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통증을 경험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실존 체험이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쌓여서 만성 통증으로 전개된 형태인 고통의 문제를 해석하고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자신만의 알고리즘이 인간의 품성을 만든다. 불교에서는 통증의 고차원 상태를 고뇌로 규정하고 철학적으로 해결을 모색하지만 인간의 성장과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고통을 해결하는 나름의 알고리즘이 만든 결과다.
뇌과학의 최근 연구들은 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뇌의 영역을 규명하는 연구를 내놓고 있다. 고통은 번연계의 경계에 위치한 대상회와 전두엽 안쪽에 속한 내측전두엽이 서로 협업을 통해 해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협업의 기능이 떨어지면 고통의 실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편도체가 동물적 수준에서 내린 처방에 휘둘려 결국 무언가에 중독되는 삶에 빠진다. 내측전두엽은 고통에 대한 메타 인지와 메타 평가를 담당하고 대상회는 내측전두엽이 제시한 가설적 솔루션을 실험하여 각자에게 적용 가능한 최적화된 솔루션을 만들어낸다. 대상회가 만들어낸 솔루션이란 고통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행위를 의미한다. 대상회는 이런 행위가 실험실 검증을 통해 작동되면 이것을 회복탄력성이라는 근력으로 만들어진다. 대상회가 만든 회복탄력성은 뇌가 생성한 알고리즘이나 루틴이다. 이런 알고리즘과 루틴이 종합되어 인간 고유의 품성이 형성된다.
내측전두엽과 대상회가 협업해서 만든 윤리적 정서가 긍휼감(Compassion)이다. 긍휼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고통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시해가며 정의하고 행동으로 내재화 해서 풀어나가려는 성향(근력)을 의미한다. 긍휼은 동물수준인 편도체의 해결 수준을 넘어서 인간만이 도출할 수 있든 해결책이다. 긍휼은 고통을 인지하는 수준인 공감(Empathy)와는 차원이 다르다. 공감은 전두엽의 사회적 가치를 담당하는 안와전두엽과 메타정서를 인지하는 기능인 내측전두엽이 협업해서 만들어낸 인지적 기능이다. 전두엽이 발달해 인지적 공감 능력이 뛰어난데 대상회가 손상되어 이것을 행동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긍휼감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종종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로 전락한다. 일반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공감과 사이코 혹은 소시오 패스는 한 끝 차이다.
긍휼감은 편도체에 의존해서 회피와 방어로 문제를 해결하는 동물과 구별할 수 있는 인간에게만 볼 수 있는 차원의 정서다. 상상할 수 있는 최적의 솔루션을 위해 행동, 인지, 정서가 통합된 상태다. 기독교에서는 긍휼로, 불교에서는 자비로, 유학에서는 인과 측은지심으로 불린다. 긍휼은 편도체의 해결책인 회피와 도망과 자기방어를 넘어서 고통의 실체를 직면하는 용기가 발현된 것이다. 또한 긍휼을 뜻하는 영어 Compassion 속에 나침반(Compass)이라는 뜻이 내재되어 있는 것도 긍휼을 가진 사람들만이 감내하기 힘든 극도의 고통을 수반하는 혼란 속에서도 나침판에 따라 행동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도 긍휼감이 발로한 것이다. 예수, 부처, 석가, 공자, 맹자 등 선천적으로 내측전두엽과 대상회가 발달된 사람들도 있지만 최근에 뇌가소성 연구들은 리더를 열망하는 사람들도 훈련으로 후천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가설을 내놓고 있다.
극심해진 물리적 통증이야 진통제로 해결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심리적 통증은 진통제로 치유할 수 없다. 심리적 고통은 오직 긍휼의 사랑(Compasion)으로 치유된다. 긍휼은 상대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내재화하고 상대와 같이 원인을 찾아서 근원적 치유에 나서는 행동이다. 긍휼은 고통의 가시를 외과적으로 빼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람으로 녹이는 행위다. 긍휼의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체험이 환대(Hospitality)이다. 환대는 병원(Hospital)의 어원이다. 병원은 고장난 사람을 치료하는 장소를 넘어 심리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인술로 치유받는 환대의 성소였다. 긍휼이 심리적 아픔에 대한 직접 치료제라면 환대는 진통제다.
리더는 긍휼감으로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환대하고 치유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사회변혁의 설계자이자 사회적 명의다. 긍휼감이 없는 리더를 리더로 세운 국가, 사회, 조직은 항상 비극적 결말을 치룬다. 긍휼감이 없는 리더의 해결책은 문제가 생기면 잘못을 감추고, 불리하면 도망가고, 사실을 선택적으로 옹호하거나 선택적으로 부정하고, 변호하고 방어하고, 약자가 나타나면 공격하는 성향인 편도체 방식의 문제해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들 사전에는 진정성 있는 사과라는 단어가 없다. 편도체 방식에 의존하는 습관이 만들어지면 문제의 본질과 그 속의 고통을 직시하려는 리더로서의 용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물과 구별되는 지금과 같은 문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긍휼의 따뜻함으로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는 것을 제어하고 감싸 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 수준의 편도체의 해결방식을 제어하고 긍휼의 사랑을 전파할 수 있는 리더와 사람들이 많아지면 환대의 공동체가 조성된다. 환대의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심리적 고통의 대부분은 플래시보 효과로 치유된다.
편도체 방식이 아니라 긍휼의 방식으로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으면 미래의 시간이 비로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얻고 실제 이런 미래를 만들기 위해 서로를 긍휼로 사랑하며 협업하는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미래는 긍휼의 리더가 협업의 공동체를 동원해 만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는 우리는 통증을 달고 산다. 통증을 자신의 통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신의 통증을 가시로 삼아 남들을 찌르는 행위가 만연한다. 많은 사람들이 통증을 가진 사람들을 루저로 규정해 통증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통증을 있는 그대로 고백할 수 있는 병원을 가진 공동체가 가장 건강한 공동체다.
자신과 타인의 아픔을 진심으로 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과 같은 초뷰카 시대 변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통스럽게 쓰러져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모두 명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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