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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이 변수가 되지 않는 공의로운 사회 학력과 학벌, 무엇이 다른가?

Jan 15, 2026 ·5분 ·jkyoon · 412
학벌이 변수가 되지 않는 공의로운 사회
학력과 학벌, 무엇이 다른가?
학력은 어떤 학교를 나오든지 스스로 공부를 통해서 얻은 자기의 개인적 실력이라면 학벌은 개인적 실력과는 상관없이 졸업장을 준 학교의 명성을 말한다. 상고만 나오고도 사법시험에 합격한 노무현 대통령은 학벌이 없이도 학력을 보인 것이다. 실력으로 판사가 되고 대통령이 된 노무현 대통령은 학벌주의자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대통령 재임시절 <검사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출현한 검사들이 열등감에 쩔어 상고출신 노무현 대통령을 학벌로 조롱하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들 학벌주의 검사들이 계승해 만든 나라가 지금의 검찰공화국이다. 무소불의 검찰공화국을 이끈 윤석열을 정점으로 서울법대는 내란과로 역사에 치명적 오점을 남겼다. 내란 주범들이 대한민국의 무질서와 먹구름으로 국민들을 지금의 고통으로 내몬 것을 생각해보면 서울법대로 상징되는 학벌주의가 사회에 얼마나 무서운 해악이었는지가 명백히 드러난다. 심지어 지금도 서울 법대 출신 판사들 사이에는 자신이 경기고 출신이었는지 타 고등학교 출신이었는지를 굳이 구별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뿐 아니라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전체에서 몇 등을 했었고 학력 고사에서 어떤 점수를 얻었는지를 훈장처럼 이야기 한다고 들었다. 이런 기준에 조금이라도 밀리는 판사들을 자기들끼리 은따 시킨다는 비현실적 이야기도 있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이 유전자 복권으로 물려받은 암기력으로 답과 법전을 달달외워 판사직을 독점하고 높은 법대에 앉아 내란 세력의 재판을 맡고 있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이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엉뚱한 이야기를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법부가 대한민국 미래를 위한 생산적 질서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자체가 없다.
학벌은 그만큼 실력과 대치점에 서 있다. 설사 서울대 법대를 나왔어도 사법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학벌은 있어도 학력은 없는 것이다. 학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윤석열처럼 9수까지 시켜가며 재정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부모를 만나는 유전자 복권에 당첨되어야 한다. 9수까지 해서 사법시험에 붙었다면 이건 학력이 아니라 돈으로 원하는 것을 취득한 셈이다. 설사 이런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해 사법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필사적으로 서울 법대 나온 학벌을 들이대며 타대학 타학과 사람들을 차별할 것이다. 실력이 받혀주지 않으면 누구든 학벌주의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똑 같이 사법시험에 붙었어도 학벌이 없는 사람이 더 실력이 좋은 것으로 판명되면 학벌이 좋은 사람들은 연합전선을 펴서라도 학력이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려 할 것이다. 학벌을 신봉한다는 것은 그만큼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방증이고 사회진보의 장애물이다. 그만큼 학벌은 학력과 대척점에 서 있다.
사회를 공진화 시키는 효익이라는 측면에서 학벌이나 학력 중 둘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할까?
사회가 완전히 닫힌 사회여서 100년이 지나도 모든 것이 대물림되는 똑 같은 사회에 살고 있다면 당연히 실력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어서 이 변화에 조금이라도 잘못 대응하면 금방이라도 망할 수 있는 사회라면 학벌의 영향력은 점점 무의미할 것이고 이 변화에 실질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실력인 학력이 가장 우선 순위에 있을 것이다. 동적으로 변화하는 사회라면 학벌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과거의 성공을 가지고 미래의 성공을 결정하려는 학벌주의는 그나마 답이 정해져 있는 산업사회에서 통용되던 방식이다. 지금과 같은 인공지능이 이끄는 디지털 시대에는 과거의 성공에 의해서 미래의 성공이 예측될 수 없다. 변화가 상수임에도 과거의 성공에 의해 미래의 성공이 정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글로벌의 변화와는 동 떨어져 퇴보하는 사회라는 증거다. 특히 우리나라의 교육은 아직도 인공지능이 촉발한 디지털 혁명 시대와는 동떨어진 산업사회의 분업과 자동화 방식에 머물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착오적 오류에 편승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있다면 이들은 사회 공진화에 큰 짐덩어리다. 이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입장이 공격을 받으면 자신들끼리의 학연을 결성해서 우리나라가 디지털 시대로의 진입하는 것을 막는 수구 카르텔 세력으로 발전할 것이다.
젊은이들이 학벌을 가지고 평생 먹고살려는 학벌의 임대사업(rent seeking)을 벗어나야 우리나라가 다시 디지털 혁신 시대의 리더십을 잡을 수 있다. 디지털 혁신시대에는 과거에 이룬 성공인 학벌이 아니라 자신의 공부한 바를 가지고 사회에 실질적 공헌을 했을 때 그 실력을 인정받는 학력사회가 요구된다. 학벌이 좋아 혼자 먹고 사는 것의 문제를 해결했어도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공진화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학력은 없는 것이다. 학벌에 대한 우상화는 좋은 학원 다녀서 토익 만점을 얻었다 하더라도 글로벌에서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실력을 보이는 것과 똑 같다. 변화에 동태적으로 대응해야하는 글로벌 기업이라면 토익 만점 맞았지만 영어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친구를 찾아서 속아 내야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환이 신속하게 이뤄지지 못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EBS에서 다큐로 방영되고 있는 [공부의 배신]이라는 프로그램은 지금 젊은이들 사이에서 학벌주의가 얼마나 심각해지고 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심지어 과잠에 고등학교 이름이 등장했다. 자신의 대학과 여기에 고등학교 이름까지 새긴 잠바를 입어야만 자신이 누구임을 증명하는 젊은이가 기득권을 지키는데 성공해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끈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겉으로 보이는 과거의 스펙은 화려해보여도 이런 계급장을 떼고 자신있게 자신을 이야기할 수 없다면 자신 정체성은 텅빈 깡통일 뿐이다.
공부 잘하는 머리를 가진 부모 밑에서 암기력이라는 유전자 복권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 아니라 공부를 시킬 재력이 있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도 유전자 복권에 이중으로 당첨된 것이다. 부모가 물려준 머리와 경제력에 의해서 결정된 학벌에 의존해서 좋은 고등학교 대학교 나오고 이런 성공을 이용해 유전자 복권에 배제 된 사람들을 차별한다는 것은 비인륜적일 뿐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거슬러 가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이 자신들과 반대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다시 학벌주의자들은 카르텔을 구성해서 정치적으로 울타리를 세우는 패거리 행동에 몰입한다. 이들은 결국 사회의 공진화를 무너트리는 일베류의 극우세력으로 전락한다.
아무런 생각없이 기득권에 목메는 어른들과 정치꾼들의 행태를 따라하는 젊은이들을 적어도 실력과 추구하는 가치로 승부할 수 있도록 이들이 중간 기착지로 들 르는 기업이 나서서 적극 개입해야 한다. 기업의 제대로 된 인사담당 임원이라면 자신의 정체성은 없고 학벌에 숨어서 자신을 과시하는 젊은이들을 가장 위험한 잠재적 시한폭탄으로 규정하고 골라내야 한다.
사회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회의가 극심할수록 과거에 얻은 학벌에 더 몰입하는 성향을 벗어버리기 힘들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대한민국 젊은이들 사이에 불고 있는 의대와 법전원 열풍은 변화가 필요한 대한민국에 부는 역풍이다. AI가 촉발한 초뷰카 시대 이런 졸업장으로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세력이 많아진다면 사회의 공진화는 요원한 문제다.
첨부한 기사 제목 <명문대 인재공식은 깨졌다>가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학벌지상주의자들을 미몽의 알에서 깨어나게 만드는 도끼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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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 Jeongkoo Yoon
About the author

Jeongkoo Yoon · 윤정구

Professor of Management at Ewha Womans University's School of Business. Writing on natural learning, double-loop reflection, and the sociology of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