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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두 가지 날개의 정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두 가지 날개의 정체
이카루스의 가짜 날개:
만용(Hubris)의 밀납
그리스 신화 속 이카루스의 추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가짜 날개’의 서사다. 아버지 데이달로스가 만들어준 날개는 깃털을 밀납으로 고정시킨 인공물이다. 이 날개는 그 자체로 돈, 권력, 명예, 등등 도구적 욕망의 상징이다.
이카루스는 비행의 황홀경에 빠져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마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망각한다. 이는 자신의 한계를 망각한 인간의 만용, 즉 휴브리스(Hubris)다. 자신의 내면적 성찰 없이 외부의 힘(밀납과 깃털)에 의존해 타오르는 욕망(태양)만을 쫓을 때, 그 가짜 날개는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린다. 결국 이카루스가 떨어진 이유는 날개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 ‘가짜 날개’를 자신의 본질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진실의 날개
문학과 예술과 성경 속에 등장하는 ‘진짜 날개’는 결코 외부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깨달을 때 내면에서 돋아나는 날개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각성하고 이 진실을 약속을 실현했을 때 알에서 깨어나거나 자신의 감옥을 벗어나는 비상을 경험하고 비상의 와중에 자신에게 날개가 있었음을 체험한다. 진실의 날개는 있음에 대해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는 존재의 날개다.
이상의 <날개>라는 제목의 주인공도 어느 날 자신에 대한 진실을 깨닫는다. 주인공은 생계를 책임지는 매춘부 아내가 주는 아달린(수면제)에 취해 어두컴컴한 방에 박제된 천재로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날 외출을 통해 아내라는 굴레와 억압의 방이 만든 세상을 보게 된다. 이 사실을 깨닫고 지금 신세계 백화점인 미쓰코시 옥상에서 외칩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여기서 날개는 외부에서 가져온 인공적인 밀납이 아니라, 거세당했던 자아의 생명력이 내면을 뚫고 나오는 회복을 상징한다. 인간은 내면의 상처가 회복될 때 진실을 얻고 진실을 얻었다는 것은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얻었음을 상징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주인공 싱클레어가 목격한 새는 ‘알’이라는 세계를 파괴하고 나온다. 데미안의 날개도 이상의 날개처럼 갇혀 사는 알 속에서 보지 못하던 세상을 파괴함을 통해 얻어진다. 타인이 만들어준 도덕과 관습의 알을 스스로 깨고 자신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직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돋아나는 ‘자아의 날개’다.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이카루스의 비극을 넘어서는 놀라운 시각적 해답을 제시한다. 그의 작품 <대가족>이나 <회귀> 속의 새는 등 뒤에 날개가 달려 있지 않다. 대신, 새의 형상 자체가 구름이 흐르는 푸른 하늘로 채워져 있다. 마그리트의 새에게 날개는 부착물이 아니다. 새 자체가 곧 하늘이며, 존재 자체가 곧 비상의 공간이다.
날개가 외부에 달린 도구일 때는 중력과 싸워야 하지만, 내면이 하늘로 가득 찬 존재에게 중력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다. 그는 어디에 있든 이미 하늘이라는 존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진실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중력을 초월해 날 수 있는 비밀의 날개가 이미 돋아있다.
정리하면 진짜 날개의 비밀은 자아에 대한 진실을 향해 날아오르는 지이다. 진실을 찾아내고 진실을 실현하기 위해 알을 깨고 나오는 비상이 주는 자유는 요한복음 8장 32절에 잘 정리되어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틴어: Veritas vos liberabit)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카루스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고, 중력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을까?
첫째, 내면의 ‘밀납’을 제거해야 한다. 타인에게 보이고 싶은 과시욕, 끝없는 물질적 욕망, 나의 한계를 부정하는 오만함은 모두 이카루스의 밀납을 찾아 나서게 만든다. 밀납으로 만든 가짜 날개는 태양(현실의 시련이나 거대한 진리) 앞에 서면 반드시 녹아버린다. 가짜 동기를 버리고 내가 누구인지 직면하는 ‘자기 객관화’가 자유의 시작이다.
둘째, ‘자아의 고독’이라는 부화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이상의 날개가 돋기 위해서는 어두운 방안에서의 성찰이 있었고, 데미안의 새가 날기 위해서는 알 안에서의 투쟁이 필요했다. 진짜 날개는 고통 없는 안락함 속에서는 돋아나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내려가 자신의 진실을 본 사람만이 중력을 거스를 지혜를 얻는다. 중력을 초월한다는 것은 중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력이라는 현실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해 떠오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셋째, 이카루스의 날개를 단 사람들은 돈, 욕망, 권력의 순환론에 빠진 경우다. 이들을 많이 얻으면 더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다는 잘 못된 믿음에 빠져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욕망,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돈을 추구하지만 결국 이들 수단과 도구가 만든 감옥에 갇혀 지내는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이카루스의 날개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은 “으로부터(From) 벗어나는” 자유와 자신의 존재목적이 담고 있는 진실을 향해 “찾아 나서는(For) 자유”를 혼동한다. 이카루스는 이미 돈, 명예, 권력을 얻어 어느 정도 From의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다. 이들의 문제는 이런 From의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삶의 존재목적을 향한 For의 자유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From의 자유에 고무되어 이런 삶의 수단을 더 많이 획득하는 For의 자유로도 설정해 순환론에 빠진다는 사실이다. 순환론의 무한회귀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소진해 날개를 잃고 추락한다. 이들 순환론자들에게 추락은 운명이다.
진정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날개는 밖에서 주어져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돋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윤석열, 김범석, 김병기, 강선우처럼 극단적으로 날개 없이 추락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의 추락이 아니라 이들의 삶을 추앙해가며 덩달아 따라 오르다 같이 추락하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다. 오늘도 비슷한 욕망을 가지고 이카루스의 날개를 찾아 나서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친구, 이웃들이다. 이들을 보면 레밍의 쥐, 불로 뛰어드는 수많은 나방, 누우떼의 죽음이 어른거린다.
우리가 지금 추락하고 있다면, 그것은 날개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처럼 욕망의 대마왕을 흠모해가며 밀납으로 붙인 가짜 날개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역으로 사람들이 “너는 지금 날개를 달았다”라는 칭송을 받았을 때 말 그대로 현혹되기보다는 내가 단 날개가 이카루스의 날개인지 진실의 날개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짜 날개는 밖에서 사서 다는 장식품이 아닐 것이다. 거만(Hubris)을 키우는 욕망의 노예 상태를 거부하고, 자신의 거만을 꺾으며, 내면의 진실을 마주할 때 비로소 등 뒤에서 돋아나는 고통스러운 축복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추락의 공포를 넘어, 진정한 의미의 비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단 날개는 욕망으로 자아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만든 가짜 날개일까?
진실을 향해 날아오르는 진실의 날개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