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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할 수 있을까?: 믿음의 존재이유
우리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할 수 있을까?:
믿음의 존재이유
신처럼 모든 것을 알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면 믿음이 존재할 이유는 없다. 믿음이란 모르는 세상이 주는 불확실성과 불안을 제거해가며 신과 소통하기 위한 인간의 발명품이다. 믿음이란 내면에 세상이 들려주는 잡음을 제거하는 울타리를 치고 신과 진실로 소통할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을 키워 만든 것이다.
믿음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는 못한다. 사이비 교주들은 인간이 세상을 모른다는 것을 악용해 신의 계시로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믿음의 증거자임을 연기해 사적 이득을 취한다. 믿음이 사이비 교주의 비즈니스의 수단으로 전용 된 것이다. 수단인 믿음이 목적이 되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할 때 수단은 남들을 해치는 흉기가 된다. 사이비 교주가 앞세운 믿음이 그것이다. 교회가 믿음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위 신자들을 믿음의 감옥에 가두고 믿음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강요한다면 교회가 아닌 유사교회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믿음의 존재이유는 생명과 번성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로 작동할 때이다. 진실한 종교적 믿음은 그 울타리 안에서 생명이 잉태되고 번성하는 삶을 향유할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진실한 믿음은 사이비에 빠진 이들이나 믿음이 없는 이들보다 더 높은 ‘생명력’과 ‘지속 가능성’을 증명함으로써 입증된다.
성경에서 믿음은 통상 밀알에 비유된다. 예수는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가르치며 믿음의 존재이유를 설명했다.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라는 생명을 산출할 때, 그 밀알은 비로소 진실된 믿음의 증거가 된다.
바울은 이 존재이유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라는 고백을 통해 실천적 측면에서 구체화한다. 죽음은 흔히 생명의 종말로 인식되지만, 생태계와 영성의 원리 안에서 죽음은 가장 강력한 생명 분출의 조건이다. 바울에게 ‘날마다 죽는 삶’이란 자기 파괴가 아니라, 역동적인 생명을 부활시키기 위한 살아 있는 믿음의 선언이다.
당시 가짜 믿음과 진짜 믿음에 대한 논란으로 분란을 겪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은 진짜 밀알의 생애주기를 통해 진짜와 가짜 믿음을 판별하는 기준을 제시한다.
판별의 첫 무대는 시련이라는 ‘소금물’이다. 진짜 밀알은 소금물 속에서 기꺼이 가라앉는다. 그 내면에 생명을 꽃피울 영양분과 에너지가 밀도 있게 차 있기 때문이다. 반면, 속이 비어 있거나 썩은 가짜 밀알은 가볍게 떠오른다. 시련이라는 소금물이 없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겉모양이 화려한 밀알 중 무엇이 진짜인지 구별할 방법이 없다. 진짜 밀알만이 사명의 무게를 견디며 기꺼이 가라앉아 ‘죽음의 자리’를 선택한다. 가라앉지 못하고 떠오른 밀알에게 발아와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라앉은 진짜 밀알만이 껍질을 깨고 뿌리를 내린다. 밀알에게 죽음이란 낡은 경계 해체이자 새로운 세계와의 결합하기 위해 더 넓은 울타리를 세우는 작업이다. 해체되지 못하는 단단한 껍질은 보호막인 동시에 자신을 고립시키는 감옥이다. 밀알이 땅속의 물로 유연해지고 껍질을 깨뜨려 산소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내면의 생명력을 태워 뿌리를 뻗어낸다. 뿌리는 세상과 소통하는 안테나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 밀알은 가짜다.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고립된 자아를 벗어나 세상과 연결됨을 의미한다. 내가 죽어 껍질이 해체될 때만 타인의 아픔이 내 뿌리에 닿고, 공동체의 갈망이 나의 영양분이 된다. 이 연결이 없는 믿음은 관념적 유희에 불과하며, 뿌리 내리지 못한 밀알은 흙 위에서 말라갈 뿐이다.
밀도가 높은 진짜 밀알은 뿌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그 에너지로 나무를 세우며 마침내 숲과 과수원을 일구는 생명력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태복음 7:16)”라고 말씀하셨다. 결론은 명확하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20).” 밀알로 비유된 믿음의 숙명은 자기 보존이 아닌 ‘생명’에 있음을 못 박은 것이다.
가짜 믿음은 껍질을 유지하느라 아무런 변화도, 연결도, 희생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소금물 위에서 안락을 취하지만 그 끝은 무의미한 소멸이다. 반면 살아 있는 믿음은 매일 자아를 죽임으로써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타인을 살리는 열매를 맺는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 곡식이 되고, 그 결실이 다시 땅에 묻히는 연쇄적 죽음을 통해 광활한 숲이 만들어진다.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하는 삶은 개인의 성장을 넘어 타인의 생명을 일궈내는 거대한 생태계의 확장을 의미한다.
리더의 ‘생사(生死)’를 가르는 척도는 입술의 고백에 있지 않다. 진실한 믿음의 계승자라면 “내 삶이 밀알이 되어 자신과 타인이 치유되고 있는가, 공동체가 회복되고 있는가, 사랑과 희생의 결과물이 나타나고 있는가”라는 엄중한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젊었을 때는 믿음의 밀알을 가진 사람으로 추앙받다 성공을 거둔 후에는 믿음을 장사 지낸 것으로 보이는 분들을 많이 목격한다. 진성리더는 삶의 개입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밀알이 되어 ‘무게 있는 죽음’을 선택해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한 자들이다. 리더의 죽음과 부활은 공동체의 근원적 변화인 풍요로운 결실로 치환되어야 한다. 껍질 안에 안주하며 소금물 위로 떠오르는 가짜의 삶을 버리고, 매일 죽음으로써 세상을 살리는 진짜 밀알의 숙명을 받아들일 때, 리더는 자신의 약속대로 숲을 이루는 생명의 신비에 동참하게 된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살아 있는 믿음의 실체를 가장 잘 표현한 시는 장석주의 <대추 한 알>이다. 시에서 대추는 살아 있는 믿음의 상징이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