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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차이’라는 이유 속에 짖밟힌 ‘타자성’ 30% 육박하는 한국의 이혼율
성격 차이’라는 이유 속에 짖밟힌 ‘타자성’
30% 육박하는 한국의 이혼율
한국의 이혼 통계는 표면적으로는 감소세에 접어든 듯 보이나, 그 내면의 밀도는 여전히 가볍지 않다. 최근 한국의 이혼율은 5년 연속 하락하며 1997년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혼인 건수 자체가 급감한 데 따른 착시 효과에 가깝다.
실제 결혼한 커플 중 이혼에 이르는 비중은 약 30%에 육박한다. 미국의 이혼율인 45%에는 미치지 못하나, 우리 사회에서도 세 커플 중 한 커플이 갈라선다는 사실은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존립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이혼의 이유는 45%가 성격차이이고 25%가 경제적 무능이다.
전체 이혼 건수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주목해야 할 대목은 ‘황혼 이혼’의 폭발적 증가다. 이는 이혼의 본질이 단순한 불화가 아니라, 상대의 ‘타자성’을 대하는 태도와 이를 지탱하는 ‘경제적 울타리’의 역학 관계에 있음을 증명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혼은 상대의 타자성을 인지하는 감수성이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 발생하는 필연적 결과다. 많은 부부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자신의 세계로 흡수하려 한다. 레비나스가 경계했던 ‘동질성(Sameness)’의 원리다. 자아는 타자를 자신의 이해 범위 안에 가두고, 자신의 성격과 가치관이라는 틀에 맞춰 상대를 길들이려 시도한다. 사용자(Self)의 울타리 안에서 타자는 고유한 존재가 아닌, 나의 편의와 욕망에 복무하는 ‘사육’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바로 ‘동질성의 감옥’이다. 동질성에 의해 포획된 타자는 아무리 엄청난 존재론적 원석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동질성을 기획한 사람의 짝퉁으로 자라난다.
황혼 이혼의 급증은 이 감옥을 유지하던 ‘경제적 울타리’가 역설적으로 해방의 도구가 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자녀가 독립하지 못하고 경제적 부양이 필요한 시기까지, 부부는 갈등을 유예하며 동질성의 감옥을 견뎌낸다. 그러나 자녀가 독립하여 경제적 울타리가 마련되고, 더 이상 상대의 경제력이나 가정의 틀에 매이지 않아도 되는 시점이 오면, 억압받던 타자는 감옥의 문을 박차고 나간다. 이는 상대의 존재적 경계를 인정하지 않고 소유물처럼 대했던 세월에 대한 존재론적 항거다.
결혼은 인간이 고립되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사회성의 최소 단위이자 환대의 출발점이다. 이혼율의 증가는 타자를 끝까지 타자로 대우하며 공존하는 것이 얼마나 난해한 과제인지를 각성시킨다. 부부 사이에 탄생한 아이는 부모로부터 유래했으나 결코 부모가 소유했다는 생각에 동질성의 감옥에 가두면 가줄수록 더 거세게 탈주한다. 아이는 유전인자의 동질성이 존재론적 주체를 넘어서지 못하는 ‘절대적 타자’다. 탈주하는 아이를 통해 부모가 아이를 타자성이 있는 존재로 대할 때 아이의 고유한 생명력을 경외하게 된다. 부부 역시 상대를 자신들이 타자로 세운 아이처럼 ‘침범할 수 없는 타자’로 대했다면 이혼이라는 파국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혼의 문턱을 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대의 성격을 고치려는 노력이 아니라, 상대가 가진 존재의 울타리를 인정하는 ‘타자 인지감수성’의 회복이다. 상대의 영역을 넘나들지 않고 그 경계를 지켜주는 윤리적 절제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경제적 풍요도 동질성의 감옥을 평화로운 안식처로 바꾸지는 못한다. 타자를 나의 사육장에서 해방해 그 자체로 마주하는 것, 그것이 무너져가는 결혼의 울타리를 다시 세우는 유일한 길이다.
타자성이 성립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부부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성격을 넘어서는 튼튼한 존재의 울타리를 구축하고 있는지다. 존재의 울타리가 없다면 상대의 침범을 유도하는 셈이고 상대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위존이 타자성이 살아있는 존재론적 관계를 위험하게 만든다. 존재의 울타리가 상대가 서로를 침범하지 못하는 공간을 제공한다.
이혼의 사유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성격차이는 전 결혼 생활 동안 고치는 것이 불가능한 상대의 성격을 자신의 성격에 맞춰 개조하려다 실패했다는 의미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처음 끌린 이유가 상대가 자신과 다른 성격을 가진 타자성 때문이었음을 잊은 것이다. 이처럼 성격을 핑계로 싸운다는 것은 성격이라는 타자성을 감쌀 수 있는 존재론적 울타리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울타리가 부재한 상태에서 서로를 성격의 동질성 감옥에 가두고 탈주를 막기 위해 길들이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다. 자신을 대표하는 가장 알몸의 상태인 성격을 가지고 싸워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감쌀 옷조차 입지 않고 알몸을 내놓고 싸웠다는 의미다.
서로가 존재의 울타리로 서로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가정이라는 더 큰 울타리로 두 존재의 울타리를 감쌀 수 있을 때 상대를 나에게 맞추려는 ‘동질성의 폭력’은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부부가 서로를 아이 대하듯 ‘절대적 타자’로 환대할 때 비로소 결혼은 정서적 충만을 가져오는 둘만의 울타리가 된다.
부부가 상대를 절대적 타자로 받아들이고 환대할 때 최소한의 사회공동체인 가정도 지켜질 수 있다. 가정은 타자성의 훈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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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황소 아홉 마리 이야기:
존재 울타리 둘러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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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어느 부족 마을에는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신부의 아버지에게 지참금으로 ‘황소’를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기준에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여인은 외모나 조건이 특출나지 않아 ‘황소 한 마리’조차 아깝다는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녀 스스로도 이러한 타인이 제공한 동질성의 울타리에 갇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거짓 정체성’을 수용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유능하고 부유한 청년이었던 자니 링고가 그녀에게 청혼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부 다처체의 마을었지만 최고로 유망한 청년이 사람들 눈에 볼품이 없는 여인에게 청혼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당연히 아주 적은 수의 황소를 지참금으로 제시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부의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황소 아홉 마리’를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아홉은 황소를 셀 때 가장 큰 숫자를 상징하고 있었고 아홉마리는 실제 마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고가였습니다. 객관적 조건이라는 동질성의 감옥을 만들고 따지며 살던 사람들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였습니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 마을을 다시 찾은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과거에 고개를 숙이고 자신감 없던 여인은 온데간데 없고,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당당하며 빛나는 기품을 가진 여인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변화는 화장이나 옷차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황소 아홉 마리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남편의 확고한 존재론적 믿음이 그녀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면서, 그녀의 자아상(Self-image) 자체가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나중에 자니 링고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저는 마을에 같이 살며 그녀 안에 숨겨진 ‘존대론적 가치’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가공되지 못한 원석이었습니다. 제가 한 일은 그 원석을 살려내기 위해 황소 아홉 마리라는 경제적 울타리를 둘러주었을 뿐입니다. 그녀는 그 울타리 안에서 울타리에 넘치는 보석임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황소 아홉마리는 동질성의 울타리에 상대를 포획해 자신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존재의 울타리를 둘러 절대적 타자로 환대하고 어떤 순간에도 이 울타리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 피그말리온 효과가 피어나는 조건임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