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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분절 수축사회에서 리더의 역할: 진성리더십이 가야 할 길
초분절 수축사회에서 리더의 역할:
진성리더십이 가야 할 길
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사회의 작동 원리를 근저에서 재편하는 지금, 우리는 기묘한 역설 한가운데 서 있다. 연결은 유례없이 늘어났으나 공동체는 소멸하고 있다. 정보는 홍수처럼 넘쳐나나 의미는 증발하고 있다. 플랫폼은 수억 명을 실시간으로 잇지만, 그 연결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더 깊은 고립으로 떨어진다. 이 역설의 이름이 바로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초분절 수축사회다.
초연결의 시대에 공동체가 소멸하다
초분절 수축사회는 인공지능과 데이터 경제가 추동하는 사회 구조의 근본적 변환이다. 표면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면에서는 사회 조직의 기본 단위가 공동체에서 계약으로, 관계에서 거래로, 존재에서 기능으로 축소되고 있다. 인간관계는 알고리즘이 최적화한 매칭으로 대체되고, 직업적 결속은 긱 이코노미의 단기 계약으로 분절되며, 오랜 역사를 지닌 제도와 공동체의 유대는 플랫폼 논리에 의해 조각조각 해체된다.
Max Weber가 근대의 도래를 ‘탈주술화(Entzauberung)’라 명명했을 때, 그는 도구적 이성이 삶의 의미 구조를 잠식하는 과정을 직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Weber조차 예견하지 못한 것이 있다. 오늘의 인공지능을 장착한 알고리즘 자본주의는 탈주술화를 단순히 가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 자체를 데이터 포인트로 환원하고 공동체를 계산 가능한 네트워크로 재조직하는 초합리화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경고한 도구적 이성이 인간존재를 장악하는 전일화(totalization)는 이제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앞세워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인공지능 기반 알고리즘은 구성원과 그들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데이터 포인트로 분절시키고 결과적으로 이들이 몸 담고 있는 공동체를 끊임없이 수축시킨다. 데이터로의 ‘분절’은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를 배제하며 사막화 되어가는 현상이고, ‘수축’은 개인이 자신의 최후 방어막이자 울타리를 좁혀가는 과정이다. 공동체를 묶어온 공유된 서사, 세대를 잇는 기억, 함께 빚어온 의례는 소멸하고, 그 자리에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계약 관계와 이들 사이의 의미 없는 데이터만 남는다. 이것이 초분절 수축사회의 현실이다.
데이터의 사막에서 공동체는 무너진다
공동체의 소멸은 단순한 사회적 불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존재론적 위기다. Zygmunt Bauman이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의 도래를 경고했을 때 그가 가리킨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확고한 형태를 갖추었던 사회적 연대의 구조가 녹아내리고, 그 유동성 속에서 개인은 정박지를 잃은 채 표류하게 된다.
첫 번째 병리는 의미의 부재다. 인간은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다. 공동체는 단순한 협력의 장치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공동으로 생산하고 유지하는 기제다. 공동체가 해체될 때 개인은 의미의 원천을 잃고 실존적 공허 속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데이터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 의미의 상실은 새로운 차원의 깊이를 갖는다. 알고리즘은 인간의 삶을 통째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을 데이터 포인트들로 분해하고, 행동을 패턴으로 환원하며, 관계를 신호로 처리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삶은 조각나고 분절되어 분석 가능한 변수들의 집합으로 재조립된다. 그러나 의미란 본래 조각들의 합산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에서, 타자와의 연속된 관계에서, 공동체가 공유하는 규범의 직조 속에서 발생한다. 알고리즘이 삶을 분절할 때, 그 분절의 칼날이 가장 먼저 베어내는 것이 바로 이 의미의 맥락이다.
Émile Durkheim은 사회구성원들이 의미를 잃어버리는 이 상태를 아노미(anomie)라 불렀다. 규범과 유대가 사라진 자리에서 개인이 무규범의 진공 속에 놓이는 현상이다. Durkheim은 아노미가 단순한 사회적 혼란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아노미는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혼동이다. 아노미적 자살(anomic suicide)은 극단적 빈곤이 아니라 의미의 붕괴에서 비롯된다. 욕망을 규제하고 삶을 방향 짓던 의미 있는 규범이 소멸할 때, 인간은 무한한 욕구와 공허한 자유 사이에서 표류하다 실존 의지를 잃어버린다. 대한민국은 데이터가 추동하는 알고리즘이 시작되기도 전에 아노미 자살률 1위 국가였다. 특히 의미의 끊을 놓치는 계층은 사회적 연대가 가장 약한 고리인 청소년과 노인들이었다. 데이터 알고리즘의 중독은 청소년과 노인들이 타겟이 아니라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전 세대가 대상이다.
데이터 알고리즘이 도구적 합리성을 앞세워 초분절 수축사회를 가속화 시킬 때 대한민국이 경험하게 될 병리적 심각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 삶의 토대를 이루던 공동체적 규범을 알고리즘에게 넘겨준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규범의 상태 속에 살며 의미를 잃는다. 알고리즘은 행동을 최적화하지만 삶의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 접속을 최대화하지만 연대를 만들지 못한다. 정보를 유통하지만 규범을 창출하지 못한다. 그 공백에서 현대의 아노미가 자란다. 아노미는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자살의 유혹이라는 형태로 개인을 잠식한다.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살률과 우울증의 지표가 가리키는 것은 단순한 정신 건강의 위기가 아니다. 사회적 병리가 전염된 것이다.
초분절 수축사회가 초래하는 두 번째 사회 병리는 신뢰의 붕괴다. 공동체는 반복된 협력과 헌신의 경험을 통해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축적한다. 계약 관계만으로 이루어진 초분절 사회에서 신뢰는 계산의 산물로 전락한다. ‘상대가 계약을 이행할 것인가’라는 합리적 기대가 신뢰를 대체하면서, 인간은 서로를 Emmanuel Levinas가 말한 ‘얼굴 있는 타자’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득실의 변수로 처리하게 된다.
세 번째 병리는 리더십에 대한 공포가 지속되어 생기는 리더십 공동화(空洞化)다. 공동체 없는 사회에서 리더십은 방향을 잃는다. 리더십이란 본질적으로 공동의 미래를 향해 사람들을 이끄는 실천이다. 공유된 미래를 상상하는 공동체 자체가 사라질 때, 리더십은 기술적 효율의 관리로 쪼그라든다. 이런 일은 굳이 인간이 나서서 처리할 일은 아니다. 결국 리더는 답을 잃고 새로운 답도 제시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리더라는 직책 때문에 공황장애에 빠진다. 구성원들도 대책 없이 책임만 많은 자리인 리더의 자리가 자신에게 넘겨질까 두려움에 시달린다. 시대가 초래한 리더십의 악순환이 초뷰카 환경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든다.
결국 이 모든 병리는 지속가능성의 위기로 결론지어진다. 생태적 지속가능성, 사회적 지속가능성, 세대 간 지속가능성은 희박해지고 모두가 희망을 잃는다. 설상가상으로 초분절된 사회에서 데이터로 분절된 개인은 ‘지금, 여기, 나’의 이익을 넘어서는 헌신을 선택할 유인을 갖지 못한다. 사회는 집합적 행동의 능력을 잃고, 공유지의 비극은 사회전체의 병리로 확대된다.
의미의 오아시스를 창조하는 공동체의 원리
해결책은 역설적으로 단순하다. 공동체를 다시 만들면 된다. 그러나 여기서 ‘공동체’는 혈연·지연·학연으로 엮인 전통적 동질성의 공동체가 아니다. 그런 폐쇄적 공동체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초분절 수축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공동체다. 이런 공동체를 다시 복원하는 원리가 바로 사회적 헌신(Social Commitment)이다.
Lawler, Thye, Yoon이 공동 발전시킨 사회적 헌신 이론(Social Commitments in a Depersonalized World)은 인간이 데이터에 의해 탈개인화된 세계에서 어떻게 사회적 유대와 공동체를 다시 생성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핵심 명제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공유된 목적, 특히 지속가능성에 관한 가치 충격적인 사명을 위해 함께 헌신하고, 그 헌신의 과정에서 긍정적 감정 체험을 공유할 때, 관계적 응집력(relational cohesion)이 창출되며, 이로부터 혈연이나 지연이 아닌 사명 기반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우리가 주창하는 사회적 헌신의 기제는 공동체 형성의 조건을 타고난 ‘동질성’이 아닌 ‘공동 헌신’에서 찾는다. 전통적 공동체 이론은 같은 지역, 같은 혈족, 같은 계층에 속하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연대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사회적 헌신 이론 기계적 헌신이 아니라 유기적 헌신에 기반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의미 있다고 믿는 일에 함께 뛰어들고, 그 공동 실천에서 감정적 에너지가 발생하며, 바로 그 감정 에너지가 관계를 결속하고 공동체를 낳는다. 공동체는 사회적 헌신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복원해야 할 공동체는 기계적 공동체가 아니라 유기적 공동체다. 기계적 공동체는 혈연·지연·학연처럼 출생과 귀속으로 주어진 공동체다. Durkheim의 개념을 빌리면, 그것은 기계적 연대(mechanical solidarity)인 동질성의 유사함이 구성원들을 묶는 공동체다. 우리가 초분절 수축사회에서 새롭게 창조해야 할 것은 유기적 연대(organic solidarity)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다. 목적을 공유하는 다양한 전문성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의 사명 앞에서 자발적으로 결속하는 공동체다. 유기적 공동체는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를 복원하는 공동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함께 뛰어드는 과정에서, 그 프로젝트에서 의미 있는 진전을 함께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서 긍정적 정서를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승리의 순간을 함께 나눈 사람, 실패의 고통을 함께 견딘 사람, 사명의 불꽃이 꺼질 듯한 위기에서 함께 그 불씨를 지킨 사람들이 공동으로 경험하는 긍정적 정서를 통해 만든 유대감이 바로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이다. 기계적 공동체처럼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실천 속에서 안으로부터 생성되는 공동체다. 출신이 다르고, 전문성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사명 앞에서 각자의 독창성을 발휘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강점으로 엮어내는 유기적 공동체다. 유기적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초분절 수축사회가 우리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
사회적 헌신에서 요구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도 요구된다. 사회적 헌신에 참여하는 개인은 초분절 수축사회가 만들어내는 파편화된 개인이 아니다. 알고리즘에 의해 페르소나가 데이터 조각으로 분해되고, 몸과 마음과 정신이 각기 다른 플랫폼의 논리에 의해 분열된 존재가 아니다. 사회적 헌신의 주체는 몸(body), 마음(mind), 정신(spirit)이 하나로 온전하게 통합된 온전한 존재(Wholesomeness)다. 몸, 마음, 정신이 온전하게 통합되기 위해서는 존재목적이라는 정체성이 요구된다. 자신이 왜 존재하는가를 알고, 그 앎이 신체적 감각과 감정적 반응과 의미론적 확신으로 일관되게 흐르는 존재 그것이 우리가 사회적 헌신의 의해 가지고 와야 할 주체다.
Durkheim은 공동체의 가치와 목적이 개인 안에 내재화될 때 비로소 진정한 사회적 연대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재화는 집단에 의한 개인의 용해(溶解)가 아니다. 공동체의 규범과 목적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면서도 독창성과 진정성을 잃지 않는 온전한 개인, 즉 도덕적 개인(moral individual)의 출현이 그 조건이다. 사회적 헌신의 공동체는 바로 이런 온전한 도적적 개인(moral individual)들이 모일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데이터로 분절된 페르소나들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통합된 존재들의 사명 공동체가 온전한 개인이 만든 사회적 헌신의 실체다.
사회적 헌신 이론이 말하는 헌신은 일상적 협력이나 단순한 팀워크를 넘어서는 협업의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 협업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을 묶어주는 제삼의 실체가 요구된다. 세대의 이익을 넘어 미래 세대와 지구적 공동 선을 향한 사명이 제삼의 실체이고 이 실체를 통해 협업이 매개된다. 협업에 대한 헌신을 통해서만 공동의 목적인 지속가능성에 ‘가치 충격(value shock)’이 가해진다. 이 가치 충격이야말로 도구적 합리성에 포획된 개인을 자기 이해(self-interest)의 울타리 밖으로 이끄는 힘이다.
사회적 헌신은 선순환 구조를 가진다. 공동체를 묶어주는 제삼의 실체인 진정한 사명에 대한 믿음(belief)이 구성원을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헌신(commitment)을 낳고, 헌신은 의미 있는 미션 프로젝트(mission projects)로 구체화되며, 그 성과는 제도적 구조(institutional structures)를 만들고, 그 구조는 공동체(community)를 재건하며, 재건된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존재우위를 회복시킨다. 사회적 헌신이 만든 선순환은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안트로피(anthropy)의 생명력이다. 초분절 사회가 가속하는 분절과 수축의 원심력에 맞서는 구심력의 본질이다.
사회적 헌신의 불씨를 지피는 사람
모두가 데이터에 의해 분절되고 쓰러져 있는데 누가 이 선순환을 시작하는가가 우리가 지금 직면한 리더십 문제다. 의미의 사막에서 오아시스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서서 먼저 오아시스를 찾는 땅을 파야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진성리더라고 부른다.
진성리더십은 기술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성찰하고, 북극성, 즉 삶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에 충실한 존재로 협업하는 것이다. 진성리더는 무엇보다 먼저 존재목적이라는 밀알로 발아해 자신의 몸, 정신, 마음 속에 뿌리가 생긴 리더다. 진성리더는 초분절 수축사회가 끊임없이 유혹하는 역할에 따른 자아의 분절, 플랫폼에 따른 페르소나의 복수화, 성과 지표에 따른 정체성의 도구화에 맞서 몸과 마음과 정신을 하나의 존재목적 아래 통합한 사람이다. 그 통합의 원천이 바로 자신의 북극성, 즉 삶의 존재목적이다. 존재목적을 행동으로 옮겨 사명의 뿌리가 착근될 때 각자의 역할이 바뀌고 환경이 흔들려도 중심은 이동하지 않는다. 진성리더가 가진 밀알은 Durkheim적 의미에서 공동체의 가치를 내면 깊이 품으면서도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moral individual로서의 밀알이다. 공동체의 목적에 복무하되 타인의 복사본이 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성리더의 존재론적 특성이다. 진성리더는 먼저 자신의 이야기(narrative)를 안다. 왜 살고,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지를 안다. 그리고 그 앎에서 흘러나오는 진정성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명 앞으로 이끈다.
죽음을 향해 치닫는 초분절 수축사회에서 진성리더가 있어서 세상은 일말의 희망의 불빛을 갖는다. 모래알로 변한 데이터의 계약 관계만이 남은 공간에서 진성리더는 구성원들에게 ‘이것이 우리가 함께 헌신할 가치가 있는 사명이다’라는 것을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준다. 그 헌신이 촉매가 되어 다른 이들의 헌신을 불러오고, 헌신의 공명(共鳴)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날줄(목적)과 씨줄(관계)이 직조되어 공동체라는 태피스트리가 완성된다.
진성리더가 이끄는 사회적 헌신의 공동체에는 전통적 공동체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열려 있다는 것이다. 동질성이 아닌 목적과 사명이 구심점이기 때문에, 이 공동체는 배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출신이 다른 사람들을 사명 아래 하나로 묶는다. Levinas가 말한 ‘타자의 얼굴과의 마주침’이 바로 여기서 일어난다. 나와 다른 타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사명 앞에서 함께 헌신하는 동료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향해 길을 내는 사람
데이터 알고리즘이 초래한 초분절 수축사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인공지능과 데이터 경제는 사회 조직의 원리를 근본에서 바꾸고 있고, 그 변화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그 변화가 인간의 공동체를 영구히 소멸시킨다는 결론은 필연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사회적 헌신 이론은 공동체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 혈연이나 지연으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사명을 향한 헌신의 실천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헌신의 주체는 플랫폼이 분절시킨 파편화된 자아가 아니라, 몸, 마음, 정신이 존재목적 아래 통합된 도덕적 개인(moral individual)이다. 의미를 잃어버린 사막 한가운데서도 오아시스는 만들어질 수 있다. 그 오아시스를 만드는 사람이 진성리더이고, 그 오아시스를 함께 가꾸는 사람들이 사회적 헌신의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우리 시대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명확하다. 계약 관계의 효율성 관리자를 넘어선 사명의 불씨를 지피는 사람이 되는 것. 분절되어 흐르는 강물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 수축하는 세계에서 오히려 더 크게 열리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 길은 자기 자신의 북극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북극성 아래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기로 결심하는 길동무를 통해 공동체는 다시 태어난다. 의미를 상실한 사막에서 길을 내는 책무가 초분절 수축사회에서 진성리더십이 가야 할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