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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 요청에 대한민국 정부가 취해야 할 협상 전략: 전략적 모호성 전략
파병 요청에 대한민국 정부가 취해야 할 협상 전략:
전략적 모호성 전략
트럼프가 이란 전쟁과 관련해 동맹국의 군사적 기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EU의 핵심 회원국들—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이 차례로 직접 파병에 선을 그었다. 무모한 전쟁광으로 나선 트럼프에 대항할 힘이 있고 아직 유엔의 영향력이 작동하는 EU가 당연히 택해야 하는 전략이다.
EU같이 집단적 동맹의 힘을 이용할 수 없는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파병 요구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현명한가?
설계된 협상의 유보:
전략적 모호성
경영전략론에서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은 행위자가 특정 입장에 섣불리 자신을 묶어두는 것을 의도적으로 지연하는 전략을 가리킨다. 커뮤니케이션 학자 Eric Eisenberg(1984)는 조직 내 전략적 모호성을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다른 해석을 공존하게 허용함으로써 갈등 없이 관계를 유지하는 언어적 장치`로 정의했다. 경영학자 James March는 더 나아가 이 모호성을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불확실한 환경에서 옵션 가치를 보존하는 능동적 합리성으로 재해석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사이 이념적 논쟁이 정치적으로 폭발할 수 있는 이슈에서 섣불리 어느 한 편의 편(commitment)을 드는 순간, 반대편은 즉각 편을 든 사람을 적으로 규정한다. 협상을 진행시킬 운신의 폭이 막힌다. 게임이론에서는 옵션 소멸(foreclosure of options)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정부가 트럼프의 파병 요청에 즉각 `예스`로 답하면 러시아 및 중국과의 전략적 여지가 닫힌다. 또한 명확한 `노`를 말하면 한미동맹의 정치적 비용이 생긴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구조적으로 더 크다. 따라서 지금 대한민국 정부에게 필요한 것은 설계된 유보(designed suspension)다.
정부의 손을 국민이 묶어주는 양동작전:
이런 전략적 모호성 전략은 진공 속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트럼프가 `왜 답하지 않느냐`고 압박할 때 정부가 내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는 국내 정치적 불가능성이다. 이것이 양동작전(兩動作戰)의 핵심 논리다.
정부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반면 국회와 시민사회는 파병 반대의 입장을 명확히 표명한다. 이 구도 속에서 정부는 트럼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방의 요청을 이해하고 함께하고 싶다. 그러나 주권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의사를 거스르는 파병은 헌정 질서상 불가능하다.` 이 메시지는 거절이 아니라 국민 주권을 지렛대로 삼은 구조적 방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극기 부대식으로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권기대회(權起大會)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란스러운 항의는 오히려 협상 테이블에서의 무게를 약화시킨다. 필요한 것은 여론조사의 수치, 국회 결의, 전문가 그룹의 공개 성명이다. 조용하되 측정 가능하고, 분명하되 감정적이지 않은 반대의 데이터의 축적을 보여주는 방식이 요구된다. 파병 반대가 대한민국 국민의 일반 입장임을 데이터로 구축하는 것, 이것이 국민 여론을 전략적 모호성의 지렛대로 전환하는 방법이다.
번들 협상에서 벗어나라:
힘을 가진 사람들이나 트럼프의 협상 방식에는 역사적 패턴이 있다. 이슈를 묶어서 번들로 제시하고(issue linkage), 한 가지를 양보받기 위해 다른 영역에서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지금 트럼프 행정부가 구사하는 번들은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트럼프는 관세, 반도체 공급망 재편, 방위비 분담, 파병, 이 네 가지 이슈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협상 테이블에 올릴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이런 번들 협상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힘을 가진 자들이 협상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반도체 관세 25%의 위협은 국내 첨단산업의 생존을 직접 압박한다. 방위비 분담 증액 요구는 재정 부담으로 연결된다. 파병 요청은 이 번들의 마지막 고리로서, 경제적 손실 회피를 위해 안보 주권을 양보하는 구도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협상이론의 고전인 Howard Raiffa는 이슈 분리(issue disaggregation)의 전략은 약자들의 전략이다. 번들 협상에서 열세에 놓인 약자들은 최대한 이슈를 개별화함으로써 각 사안에서의 논거를 강화하고 상대방의 레버리지를 약화시켜야 한다.
대한민국 외교부와 통상 당국은 각 이슈를 독립된 협상 채널로 분리하는 작업을 선제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관세는 WTO 규범과 산업 논리의 테이블에서, 방위비는 NATO 연동 기준과 동맹 기여도의 테이블에서, 파병은 헌정 절차와 국민 주권의 테이블에서 따로 다루어야 한다. `관세 협상에서 안보 결정을 강제하는 것은 동맹의 언어가 아니다` 는 원칙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선제적으로 천명하는 것이 번들 협박을 무력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부분 최적화 협상의 구조적 함정:
트럼프 전략의 헛점
트럼프의 협상 전략은 명확하다. 모든 관계를 양자 게임(bilateral game)으로 환원하고, 그 안에서 미국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부분 최적화(local optimization) 전략이다. 트럼프는 이것을 협상 기술이라 부르겠지만 협상을 제대로 연구한 학자의 입장에서 이런 협상은 전체 최적화(global optimization)를 위한 윈윈 철학이 없는 망나니 장사꾼이 쓰는 블러핑 기반 협상 전략이다. 협상에 중독된 사람들만 이런 벼랑끝 블러핑 전략을 쓴다.
관세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고, 달러 헤게모니에 균열이 생기고, 동맹국들의 신뢰가 침식되면서 트럼프의 양자협상을 기반으로 한 부분최적화 전략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리자 갑자기 입장을 바꾸어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전체 최적화의 언어를 꺼내 들었다. 파병 압박도, 우크라이나 중재 제스처도 그 연장선에 있다. 뼈속까지 장사꾼인 트럼프가 개과천선한 것으로 읽기보다는 국면 전환을 위한 새로운 블러핑이다. 이것은 궁지에 몰린 게임플레이어가 룰을 바꾸려는 전술적 조작이다.
리더십 연구에서 신뢰(trust)는 일관성(consistency)에서 발생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부분 최적화를 구사하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전체 최적화의 수사를 동원하는 지도자는 어느 쪽의 신뢰도 확보하지 못한다. 동맹국은 `저건 또 무엇을 얻으려는 포석인가`를 묻고, 경쟁국은 `모순을 파고들면 된다`는 계산을 한다. 진성리더십(Authentic Leadership)의 핵심 전제는 내면의 철학과 외부의 언어가 일치하는 것이다. 그 일치가 없는 곳에서 협상 기술은 일시적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한 관계를 구축하지 못한다.
모래성의 원리가 여기에 있다. 임계점(critical threshold)에 도달한 모래성에서는 모래 한 줌의 추가가 전체 붕괴를 유발한다. 자기 조직화 임계성(self-organized criticality) 이론에서 Per Bak이 밝힌 이 원리는 트럼프식 부분 최적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수십 개 동맹국들의 누적된 불신,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는 국가들의 조용한 움직임, 공급망 다변화의 가속, WTO 우회의 확산을 모아 트럼프가 부분 최적화의 모래성을 쌓고 있지만 무너지는 임계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중간선거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어느 순간 한 줌의 모래가 더해지면, 그 협상 기술로 자긍심을 얻어 온 트럼프의 모래성은 무너질 운명이다. 그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경고는, 트럼프를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 모래성에 기대어 서있는 모든 나라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모호성은 비겁함이 아니다.
진성리더들이 취하는 급진거북이의 전략적 본질은 여기에 있다. 거북이는 느린 것이 아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존재목적의 약속을 실현하는 마지막 장소를 알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는다. 섣불리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다. 철학이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전략적 모호성은 비겁함의 포장지가 아니라, 고도의 합리적 선택이다.
EU가 거절하는 것을 보면서 대한민국이 단지 따라가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동시에 미국의 요청에 즉각 응하는 것처럼 보여서도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고유한 논리인 민주적 절차, 헌정 질서, 한반도 안보의 특수성으로 구성된 독자적 거절 문법이다.
국민이 반대한다. 국회가 동의하지 않는다. 정부는 돕고 싶지만 이 구조 안에서 움직일 수 없다. 이 세 개의 목소리가 정교하게 조율될 때, 그것은 외교적 굴종도 적대적 거부도 아닌 주권 민주주의의 당당한 응답이 된다. 그 응답을 설계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요청된 진성(眞性)의 과제다.
지금까지 트럼프는 자신이 이행해야 할 의무는 상황에 따라 바꾸고 최대한 생색내며 갖은 방법으로 대한민국과 세계를 압박해왔다. 따지고 보면 바이든 전임 행정부에 비해 트럼프가 대한민국에 실제 이득을 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트럼프의 무너질 모래성 옆에서 대한민국의 존재목적과 민주국가로서의 기초를 점검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