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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컴백 공연에 대한 개인적 소견: 꾸밈만 화려했던 공연

Jul 4, 2026 ·10분 ·jkyoon · 1
BTS 컴백 공연에 대한 개인적 소견:
꾸밈만 화려했던 공연
2026년 3월 21일 광화문에서 펼쳐진 BTS의 컴백 공연은 초연결 시대가 직면한 소통의 불균형과 K POP 리더십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번 공연은 표면적으로는 전 세계 190개국을 넷플릭스라는 거대 유통망으로 연결하며 기술적 승리를 거둔 듯 보이나, 그 내면은 머리와 가슴이 분리된 유체이탈의 현장이었다. 넷플릭스를 통한 유통은 정보와 데이터의 전달이라는 수단적 기능을 극대화했으나, 이는 동시에 ‘아미(ARMY)’라는 공유 정체성 기반의 정서적 공동체를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시장적 계약 관계로 치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가장 뼈아픈 지점은 국방의 의무까지 신성하게 마치고 돌아온 멤버들의 헌신이 CEO의 모랄 해저드로 비난을 받고 있는 하이브 방시혁 의장의 ‘머리’에 의해 다시 철저히 수단으로 전락하며 종잇장처럼 취급되었다는 느낌이다. 공공선에 대한 존재목적을 상실한 리더가 구성원의 삶과 심장을 연결하는 도덕적 구심점 역할을 포기했을 때, 아티스트의 고귀한 사명감은 수익 창출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자본의 논리에 납치된 CEO 방시혁의 리스크 앞에, 신성한 의무를 다하고 돌아온 BTS의 헌신이 복귀 무대에서조차 희생양으로 전락해 무너져 내려야 하는 현실이 지극히 개탄스럽다. K-pop의 쇄빙선 역할을 하며 거친 바다를 열어온 BTS 리더십이 방시혁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침몰하고 있다면, K-pop 전체의 운명 또한 암담한 미래를 예고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비극적 단절은 공연 중 선보인 곡 ‘Swim’의 연출에서 극에 달했다. 본래 가사가 지향하던 연대와 극복의 의미와는 달리, 무대 위에서 투영된 메시지는 아이들을 차가운 수영장에 그저 던져 넣어놓고 “지금부터는 너희들이 알아서 수영을 배워 살아남으라”고 강요하는 비정한 신자유주의 생존 게임으로 읽혔다. 이는 유기적 공동체 안에서 정서적 지지와 긍정 감정을 나누며 함께 나아가는 협업의 과정이 아니라, 수단적 기능만 남은 초분절 수축사회의 냉혹한 단면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다.
공연의 중심 테마였던 ‘아리랑’ 역시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진실한 메시지 보다는 상업적 비판을 피하고 방시혁의 문제를 감추기 위해 덮어 놓은 거적(Gimmick)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랑을 위해 출연한 코러스의 인상적 장면은 바이럴이 되어 공연의 끝까지 전개되지 못하고 갑자기 해고라도 당한듯 사라져 버린데에 대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참된 자신의 이치를 아는 즐거움을 노래하는 아리랑​(我理朗)은 공연 철학이 아니라 그냥 미끼이자 포장이였다. 한국적 정체성을 도구화하여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 했던 아리랑에 담긴 의도는 오히려 아티스트가 몸과 심장으로 표현해야 할 자유로운 예술적 에너지를 규격화된 틀 속에 가두는 족쇄가 되었다.
이번 공연은 리스크를 경험하고 있는 리더에 의해 온전한 존재론적 사람이 아니라 페르소나의 데이터로 분절된 존재들이 머리로만 연결되어 공연을 펼칠 때 느끼는 고독을 해결하지 못한 채, 정교하게 설계된 상업적 장치 안에서 감각 없는 계산자로 전락한 아티스트와 팬덤의 비극적 풍경만을 남겼다.
김구선생을 생뚱맞게 자꾸 인용하는데 김구 선생이 이런 방시혁이 이끄는 상업적 의도에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구선생은 <문화의 힘>이 특정 회사의 상업적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부끄러워 하실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진실한 브랜드 체험이라는 것은 리더의 철학이 자신과 구성원의 가슴을 울리고 이것이 연합해 몸으로 표현될 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을 상실한 리더가 머리로 이끄는 공연은 아리랑을 연출하고 김구를 인용해 전략적으로 현란하게 꾸며도 그냥 텅빈 꾸밈과 연기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K POP은 철저히 하이브의 방시혁을 해고하고 방시혁과 분리되어 대한민국에 내재한 철학적 정서를 진지하게 다시 발굴해 전개시킬 수 있을 때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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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을 상실한 진정성 연가
머리, 가슴, 몸의 분절
BTS는 시대가 잃어가는 진정성을 우리의 한이나 김구선생의 철학을 반영해 세계의 젊은이들의 언어로 소구해 초유의 글로벌 브랜드 파워를 형성한 K POP의 쇄빙선을 자처했던 아이돌 그룹이다.
이런 글로벌 브랜드를 기획한 머리는 하이브로 대표되는 방시혁이었고, 방시혁의 진정성을 믿고 퍼나른 BTS의 가슴은 전세계에 퍼져 있는 아미라는 이름의 팬이다. 마지막으로 진졍성에 대한 아미의 가슴을 울리는 철학을 완벽하게 표현한 7명 아티스트의 몸이 있었다. BTS 브랜드는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머리, 가슴, 몸이 협업해 만들어낸 초유의 예술 작품이었다.
지금 BTS를 둘러싼 끊임없는 논란의 원인은 가슴을 구성하는 아미와 몸을 구성하던 7명의 다시 완전체로 모였는데 머리를 구성하던 하이브 방시혁의 일탈에서 생긴 문제다. 머리였던 방시혁이 초심을 잃고 디커플링 되어 탈로해 길을 잃은 상황이 반영되어 공연에도 균열이 드러나는 모습이 연출되자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BTS가 이전에 누렸던 세계와 한국을 대표하는 온전한 진정성 브랜드의 가치를 지속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불안이 제기되었고 이 불안에 대해 옹호론자들이 반격을 가하는 행동이 논쟁과 논쟁을 촉발했다.
본인이 가장 우려하는 지점은 머리가 가슴과 몸으로부터 분리된 이 상황에도 BTS에 대한 일방적 옹호는 문제의 원인 제공자인 하이브와 방시혁 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진정성이라는 철학을 발굴해 명성을 얻었던 사람은 진정성을 잃었고 진정성을 잃었음을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고 있음에도 이 사람은 한류 진정성의 원조로 진정성에 대한 특허를 가지고 있으니 무슨 잘못을 하던 계속 진정성으로 사업을 하도록 면죄부를 발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이번 공연에서 드러난 ‘머리가 가슴과 몸으로 부터의 분리’되어 따로 노는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균열의 원인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직시하지 않는다면 K POP의 미래는 없다. 예술의 가장 중요한 브랜드 가치인 진정성을 잃었어도 자본가의 논리로 아티스트의 헌신을 수단화하여 돈벌이에 성공한 사업가들을 공인하는 산성화된 생태계에서 이들의 노래와 춤을 자발적으로 퍼 나를 아미는 생성될 수 없다.
아미와 7명의 젊은 아티스트가 이미 진정성이 오염된 것으로 증명된 방시혁과 하이브로 부터 독립하지 못하면 이들이 부르는 진정성 연가는 연가가 아니라 상업적 목적으로 진정성을 상품으로 포장해 파는 진정성 연기일 뿐이다. 사태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대한민국 전체가 방시혁의 진정성 없음을 세탁하는 세탁기로 전락할 수도 있다.
아쉽게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쟁을 한층 더 들어가 해부해보면 이런 균열을 인정하지 않고 BTS를 완전체인 것처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진영론자들이 쓰는 정치 기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들이 가장 선두에 내세우는 진영론적 정치 공세는 아재라는 낙인을 이용한 방어공세다. 이들은 합리적인 비판을 수용하기보다 비판자의 자격을 아재라는 이름으로 박탈하는 ‘정치적 프레임’을 사용한다.
옹호론자들에게 아재는 세대론적 낙인이자 정치공세다. 비판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BTS의 심오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재들의 투정”일 뿐이다. 옹호론자에게 비판자는 구세대(Outdated)’로 디지털 문법과 초연결 시대의 팬덤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노년층이거나 기성세대를 대변하는 잔소리꾼이다. “당신들은 현대 팝 시장의 표준을 모른다. 아재들의 시각으로 혁신적인 무대 연출과 자본의 흐름을 재단하지 마라” 며 상대를 ‘아재의 감옥’에 가두어 문화에 대한 문외한 취급하며 발언권을 박탈한다.
예술에 답이 정해져 있다면 그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 정치적 선전공세일 뿐이다. 과거 나치가 특정 예술가 집단을 사회적 무능력자나 악으로 규정해 배제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시대 변화를 빌미로 예술의 본질인 “다양성”과 ‘진실함’에 대한 요구를 아재의 올무에 묶어 묵살한다면 이들은 예술을 빌미로 위험한 정치적 모험을 감행하는 셈이다.
둘째, BTS를 일방적이고 맹목적으로 옹호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진영론을 정당화 하기 위해 이미 아미인 것으로 추정되는 자신의 아들과 딸의 주장과 개인적 특수한 희열 체험을 자주 인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이 이런 대리 투사에 힘쓰는 이유는 자신들의 방호행위가 또 다른 아재가 다른 아재를 공박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들이 아미 자녀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BTS의 아미는 “수평적 연대가 일군 성역”라는 믿음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런 믿음은 정당한 믿음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에게 아미(ARMY)는 단순한 팬이 아닌 ‘능동적 주체이자 민주적 공동체’로 신격화되어 있다. 이들에 대한 어떠한 부정적 평가도 신성집단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한다.
초기 철학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BTS에게 아미는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깨어있는 시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팬덤의 결속력은 기존의 권위적 비평가들을 무너뜨린 민주적 힘의 승리였던 것도 맞다. 하지만 지금처럼 팬덤의 힘을 강조하며 아미를 리더의 도덕적 해이를 방어하는 방패로 삼는다면 이들에게 아미는 진영론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한다. 하이브의 방시혁 의장이 보여준 경영 리스크와 아티스트의 도구화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팬덤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하여 본질을 회피한다면 이는 집단지성을 앞세운 또 다른 형태의 군중주의일 뿐이다.
진영론을 앞세워 BTS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마지막 논거는 지금까지 BTS가 기여한 숫자와 성과를 내세우는 공리적 효익이다. 전 세계 문화 유통망을 장악하고 빌보드를 점령한 성과가 국익에 얼마나 큰지 아는지를 되물어 가며 사소한 운영상의 문제나 리더십 결함을 들춰내어 K-POP의 동력을 꺾지 마라고 주장한다. BTS는 K-POP의 쇄빙선이었기 때문에 애국주의자라면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이 이미 거세된 상태에서 이런식의 공리주의 논리는 절대로 지속 가능한 논리로 자리잡을 수 없다. 효익은 올 수도 있고 사리질 수도 있지만 효익을 가져온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판단하지 못한다면 효익이 사라져도 개선을 위해 개입할 방법이 없다. 문제에 대한 근본적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눈에 보였던 효익만 강조한다면 이번 공연으로 K 상품이 누리는 특수는 지속가능하지 못한 불나방 효과일 뿐이다. 원인에 대한 처방없이 성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전체주의적 사고만 부축일 뿐이다.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김구 선생이 주창한 ‘문화의 힘’은 외형적 부강함이 아니라 내면의 도덕적 우위와 타인에게 주는 진정한 행복에서 나온다. 철학을 상실한 ‘머리’가 계산한 논리로 ‘심장’이 빠진 공연의 공허함을 덮으려는 시도는 문화적 기만에 가깝다.
일방적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이런 정치적 항변은 결국 상대를 가두고 자신들을 성역화 하는 방호벽을 쌓을 뿐이다. 비판적인 시각을 무작정 방어하며 세대 갈등을 조장하기보다, 무대 위에서 노출된 철학적 빈곤을 인정하고 다음 공연에 반영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적 태도다.
이런 문제는 하이브와 방시혁이 이러한 ‘옹호의 감옥’ 뒤에 숨기보다는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진정성 있게 사과하고 개선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고 BTS를 자신들의 키운 가마우치가 아니라 자유를 위해 날아갈 수 있는 백조로 풀어준다면 보기보다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다. 팬덤 속에 숨어 애국주의를 방패로 삼는다면 하이브와 방시혁의 BTS는 김구선생이 이상향으로 삼았던 높은 문화의 힘도 앞장서 모독하고 아리랑 속에 담긴 민족의 진정성 정서도 정교하게 설계된 상업적 기믹(Gimmick)으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염원했던 ‘높은 문화의 힘’은 타인을 배척하고 우리 편만 옳다고 우기는 독선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쓴소리를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며, 남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발현된다.
아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민족에게 아리랑(我理朗)은 “참된 지신의 이치를 구가하는 즐거움”을 예찬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 흐르는 진정성을 찬미하는 노래다. 머리가 분절되자 아리랑조차도 공연 철학이 아니라 그냥 공연을 성공시키기 위한 미끼이자 포장으로 전락했다. 한국적 정체성을 도구화하여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 했던 아리랑에 담긴 의도는 오히려 아티스트가 몸과 심장으로 표현해야 할 자유로운 예술적 에너지를 규격화된 틀 속에 가두는 족쇄가 되었다.
방시혁 의장과 하이브, 그리고 그들을 일방적으로 변호하는 비평가들은 이제 ‘아재’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고 아재의 감옥에 죄없는 사람들을 가두는 편견과 아집의 정치적 행위를 멈춰야 한다. 인간의 진정성은 무결점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자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고통을 주체적으로 감당하는 <학습하는 죄인>의 모습을 통해 표출된다. 아티스트의 땀방울이 시장의 데이터로만 환산되지 않도록, 그리고 팬덤의 사랑이 비판을 막는 방패로 오용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해체하여야 한다.
한류가 지속가능한 한류로 살아 남으려면 김구선생이 세운 문화강국의 울타리를 다시 보수하고 울타리 안에 아리랑의 운동장을 다시 세우고 이 운동장에서 주체적으로 시대적 진정성을 찬미할 수 있는 그룹들을 초대해야 한다. 진실한 리더십은 비판자들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심장으로 받아들여 무대 위의 진실함으로 다시 승화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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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 Jeongkoo Yoon
About the author

Jeongkoo Yoon · 윤정구

Professor of Management at Ewha Womans University's School of Business. Writing on natural learning, double-loop reflection, and the sociology of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