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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게 어떤 미래를 물려줄 것인가? 인간의 사회화 vs 스마트폰 사회화
어린이에게 어떤 미래를 물려줄 것인가?
인간의 사회화 vs 스마트폰 사회화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독립해 산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지구상 어떤 생명체도 실현하지 못한 기적이다. 동물은 본능이라는 자연의 프로그램에 따라 환경에 적응하지만, 인간은 동물 세계를 지배하는 진화론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인간은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를 새로운 세대에 전달하며, 문화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자신의 환경으로 내면화하는 능력인 사회화(socialization) 을 통해 자연의 지배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언어, 제도, 규범, 예술, 종교, 이 모든 것이 자연이 아닌 인간이 구성한 환경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연이 아닌 이 구성된 사회 환경 속에서 자신을 빚어낸다.
이 문화의 사회화의 과정은 단순한 학습이 아니다. 그것은 뇌 자체의 물리적 재편을 수반한다. 인간의 아이는 태어날 때 약 860억 개의 뉴런을 가지고 세상에 온다. 그러나 이 뉴런들 사이의 연결인 시냅스는 아직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무성한 밀림의 상태에 있다. 연결의 가능성은 무한하지만, 어떤 길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 이 밀림에서 길을 내는 작업이 바로 시냅스 프루닝(synaptic pruning)이다. 자주 발화되는 신경 회로는 강화되고, 사용되지 않는 회로는 제거된다. 인간이 문화를 자신의 환경으로 받아들이는 사회화란, 뇌과학의 언어로 번역하면, 바로 이 프루닝 과정이다. 아이가 어떤 문화적 자극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느냐가 어떤 신경 회로가 살아남느냐를 결정한다.
프루닝이 완성된 이후, 살아남은 회로에는 미엘린(myelin)이라는 절연 물질이 감싸진다. 미엘린화(myelination)는 신호 전달 속도를 최대 100배까지 높인다. 프루닝으로 선택된 길을 고속도로로 포장하는 과정이다. 이 미엘린화가 완성되면, 그 회로는 사실상 구조적으로 고착된다. 선인(禪人)들이 ‘도(道)는 닦아야 빛난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아마 이 신경과학적 진실을 직관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무엇이 그 길을 처음 낸 뒤에 어떻게 포장되는가다. 포장까지 끝난 뇌 속 신경망 지도가 보는 현실을 구성한다. 세상의 모든 현실은 자신 머리 속 신경망 지도의 재현이다.
신경망 지도가 완성된 어른에게 새로운 사회적 맥락 전체를 학습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른의 뇌는 이미 길이 나 있고 포장까지 완성된 지도다. 그 지도 위에서의 신경가소성에 기반한 수정은 가능하더라도 제한적이고 부분적이고 미시적일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이 프루닝을 지배할 때
스마트폰이 사회화의 주체가 되어 프루닝을 관장하게 허락한다면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등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에서는 아이들의 프루닝을 스마트폰 알고리즘에게 위임하는 환경으로 바뀌고 있다.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알고리즘의 목적은 단 하나다. 사용자의 체류 시간을 극대화하는 것. 이를 위해 알고리즘은 도파민 보상 회로를 가장 효율적으로 자극하는 콘텐츠를 끝없이 제공한다. 예측 불가능한 보상, 즉각적 반응, 사회적 승인의 신호, 좋아요와 팔로워 수가 스마트 폰 속의 알고리즘의 KPI로 장착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아이들의 뇌에서 특정 신경 회로를 반복 발화시킨다. 프루닝의 원리에 따라, 그 회로들은 살아남는다. 반면, 지루한 현실, 느린 인과관계,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필요한 섬세한 주의력, 불확실성을 견디는 인내심을 담당하는 회로들은 상대적으로 약자가 된다. 가지치기당한다.
Jonathan Haidt는 『The Anxious Generation』(2024)에서 이 문제를 역학적으로 추적한다. 그는 2012년을 전후하여 영미권 청소년들의 정신건강 지표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우울증, 불안장애, 자해, 고독감의 수치가 거의 수직으로 상승한 그 시점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청소년들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 시점과 정확히 겹친다. Haidt는 이 현상을 ‘아동기의 대규모 재배선(The Great Rewiring of Childhood)’이라 명명한다. 특히 여아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한 사회적 비교와 관계적 공격성에, 남아들은 게임과 포르노그래피를 통한 현실 회피에 각각 고유하게 취약함을 데이터로 증명한다. 놀이 기반의 아동기가 스크린 기반의 아동기로 대체되면서, 아이들이 반취약성(antifragility)을 형성할 수 있는 실패, 갈등, 불확실성의 경험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이 그의 핵심 진단이다.
Haidt의 분석이 포착하지 못한 사실은 프루닝의 단계에서 알고리즘이 개입할 때, 그 영향이 단순한 심리적 중독을 넘어 신경망 지도 자체의 왜곡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성인의 뇌는 이미 시냅스 지도가 확정된 상태다. 알고리즘의 자극은 기존 구조 위에서의 기능적 변형이다. 고통스럽지만 상대적으로 가역적이다. 그러나 프루닝이 진행 중인 아이의 뇌에서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자극 패턴은 회로 선택의 기준 자체가 된다. 이것은 기능적 변형이 아니라 구조적 각인(structural imprinting)이다. 한번 가지치기당한 시냅스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알고리즘이 설계한 비현실인 무한한 즉각성, 왜곡된 신체 이미지, 실제 관계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은 수준의 자극 밀도가 아이에게는 현실로 각인된다. 그리고 미엘린화가 이 왜곡을 고속도로로 포장하면, 그것은 이제 되돌리기 극히 어려운 삶의 기본 운영 체계가 된다.
사회화의 주체성를 되찾는 일
물론 어른들도 스마트폰 중독으로 고통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완성된 지도 위에서의 표류다. 아이들의 경우는 다르다. 아이들은 아직 지도를 그리는 중이다. 스마트폰에게 프루닝을 맡긴다는 것은, 지도를 그리는 펜을 알고리즘에게 넘기는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하는 것은, Haidt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안한 세대(The Anxious Generation)’가 완성된다. 더 정확히는, 비현실적으로 구성된 현실 안에 갇혀 현실 세계와의 연결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 세대가 만들어진다. 인간으로서 완전한 길 잃음의 상태가 구현되어 인간은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끝없이 시달리다 결국 마지막 실마리를 놓치면 아노미 자실을 감행한다.
스마트폰 알고리즘이 사회화의 주체가 되는 일을 막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직접적인 처방은 프루닝이 완성되기 전, 즉 초등학교 졸업 이전까지 스마트폰에 대한 아이들의 접근을 사회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Haidt 역시 이 처방을 지지하며, 14세 이전 스마트폰 금지를 명시적으로 권고한다. 이는 개별 가정의 선의에 맡겨서는 작동하지 않는 처방이다. 왜냐하면 모든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갖고 있는 환경에서 혼자만 갖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사회적 고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집합적 행동 문제(collective action problem)다. 한 가정의 결단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협약이 요구된다.
단순한 금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근본적인 처방은 아이들의 프루닝을 채울 진정한 사회화의 경험을 복원하고 채워 넣는 것이 필요하다. 스크린이 빼앗아간 것은 단순히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밀림을 걸어 다니며 몸으로 길을 내는 경험이다. 불확실한 놀이, 실제 친구와의 갈등과 화해, 지루함을 견디는 시간, 어른과의 진지한 대화, 자연과의 접촉 등 모든 것이 알고리즘이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프루닝의 원료다. 반취약성은 스크린 앞에서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저항과 불확실성을 통과하는 현실 경험 속에서만 구성된다.
진성리더십(Authentic Leadership)의 관점에서 이 문제는 더욱 선명하게 읽힌다. 진성리더의 가장 깊은 토대는 존재우위(Existential Advantage)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 앎으로부터 행동하는 능력에 있다. 그런데 프루닝의 단계에서 알고리즘이 자아의 신경학적 기반을 선점해버린다면, 이후에 아무리 좋은 인성교육과 리더십 교육을 제공하더라도 그 토대는 이미 흔들려 있다. 오랜 시간 리더십을 연구해오면서 관찰해온 것 중 하나는, 점점 더 많은 참가자들이 자신의 내면 목소리를 듣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에는 세상에서 들리는 잡음이 너무 많다. 알고리즘이 심어준 욕망과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약화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프루닝의 단계에서 무엇이 그 밀림을 걸어 다녔는가의 문제다.
문명적 선택의 시간
아이들의 프루닝을 인간이 지배하는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지는 결국 어떤 인간이 다음 세대의 주체로 세워지는지의 문제다. 또한 어떤 인간이 다음 세대에 주체로 세워지는지는 우리 사회가 지속될 수 있는지의 문제를 결정한다. 결국 우리의 운명에 관한 문제다. 스마트폰 규제는 그래서 단순한 미디어 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화의 주체를 누구에게 맡겨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구현할 것인가에 관한 문명적 선택이다.
필자가 『급진거북이(잉걸북스 2025)』에서 논증했듯이, 진정한 변화는 비전의 급진성과 실행의 점진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스마트폰으로부터 아이들의 프루닝을 지키고 인간을 프루닝의 주체로 다시 세우는 일은 그 급진적 비전에 해당한다. 그 점진적 실행은 가정, 학교, 지역사회, 국가가 함께 협약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어느 한 층위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집합적 행동만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
우리는 아직 그 선택을 의식적으로 내리지 않았다. 아니, 이미 내리고 있는 중이다. 다만 의식하지 못한 채로. 아이들의 밀림이 알고리즘의 손에 의해 가지치기되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 편의라 불렀다. 지금이라도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신경망 지도를 물려주려 하는가? 그 지도를 그리는 펜을 과연 누구의 손에 쥐어줄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