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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은 존재의 집인가? 아니면 존재의 감옥인가?
내가 사는 곳은 존재의 집인가?
아니면 존재의 감옥인가?
가장 인간다운 언어는 시인들이 사용하던 존재의 집으로서 언어다. 인간은 시인의 언어로 자신에게 존재의 집을 선물할 때 삶의 원초적 불안을 극복하고 가장 인간다운 존재로 사는 모습을 구현한다. 시인과 철학자의 경지에 올라 만든 존재의 집은 단순이 불안을 극복하고 안락을 추구하는 세속적 안식처를 넘어 자신의 존재목적 이라는 실존을 증명하는 성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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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중 언어의 본질적 기능을 존재의 집을 짖는 행위로 규정한 사람은 하이데거다. 하이데거는 평생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규정하는 명제를 주제로 탐구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집을 만드는 인간의 언어와 기술을 위한 도구적 언어를 구분했다. 하이데거는 도구적 언어의 효율성에 사로잡혀 인간의 언어를 잃는 상황을 경계했다. 본인은 정작 디지털 시대에 살지 않았음에도 현대 디지털 문명에서 기술적 언어를 우상화 하려는 시도에 대한 서늘한 경고를 날렸다.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단순히 정보를 나르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인간이 거주할 수 있게 하는 성스러운 터전이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딩 선생은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며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모든 것은 이미 죽은 시인들이 시를ㅈ통해 존재의 집으로 열망하던 것들을 현실에서 구현한 것이라는 설명은 하이데거의 언어철학을 가장 잘 표현한 대사다. 시인의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노래하며 감추어진 존재의 진리를 밝히고, 인간을 세계라는 대지와 단단하게 결속시킨다. 이 존재의 언어가 내리는 비는 메마른 인간 세상의 땅을 적시고 응축시켜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견고한 지반을 만든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언어는 존재의 아프을 보살피는 시적 언어가 아니라, 거대한 클라우드 기술 시스템이 장악한 알고리즘의 언어다.
알고리즘의 언어는 인간의 복합적인 페르소나를 데이터라는 파편으로 분절시켜 만들어진다. 알고리즘 언어는 기술적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의 삶을 수치로 쪼개고 이를 다시 클라우드에 저장한다. 이런ㅈ기술적 언어 행위는 존재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해체하여 부품화하는 공정에 가깝다. 클라우드가 개인에게 내리는 맞춤형 데이터의 비는 겉보기에 풍요롭지만, 실상은 이미 존재로 향하는 길을 잃고 모래 사막을 헤매는 인간에게 고도의 갈증을 유발하는 신기루다. 이 비에 노출될수록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시스템에 의해 규정당하며, 그 안에서 느끼는 불안은 끝없는 일상의 소음이 되어 삶을 잠식한다. 이는 존재의 근거를 잃어버린 채 기술 언어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현대인이 겪는 비본래적 불안이다.
하이데거가 암묵적므로 언급한 존재의 비는 우리를 다른 종류의 불안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일상으로 다가오는 일차적 불안을 넘어 죽음이라는 인간의 유한성을 직시하게 만드는 근원적 불안을 직면하는 용기를 준다. 일상의 사소한 걱정에 매몰된 불안이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면, 존재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죽음의 불안은 오히려 인간을 가장 생산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내가 언젠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명확한 한계를 깨달을 때, 인간은 비로소 시스템이 강요하는 익명의 삶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결단성을 회복한다.
존재의 집이 허물어지는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는 이 두 가지 불안의 성격을 명확히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
알고리즘의 비가 내리는 소리에 매몰되어 내면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면 기술을 대하는 엄격한 태도가 요구된다. 하이데거는 도구가 가장 도구다울 때는 그것이 눈에 띄지 않게 존재감 없이 묵묵히 제 기능을 수행할 때라고 보았다. 망치가 고장 나야만 우리가 망치의 존재를 인식하듯, 도구는 제대로 작동하는한 존재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오늘도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알고리즘의 언어를 인간의 존재 자체를 설명하는 절대적인 진리로 승화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는 위험 수치를 넘어서고 있다. 특히 예술과 시까지도 알고리즘 언어기계에 맡기는 시도는 인간 존재를 포기하는 지살행위다. 데이터가 나를 다 안다고 믿는 오만과 알고리즘을 존재의 층위로 격상하려는 노력을 멈춰야 한다. 알고리즘이 추동하는 기술 언어를 철저히 도구의 영역에 묶어 두어야 한다. 시인의 언어가 알고리즘의 언어에 올라타 존재를 고양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알고리즘의 사막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 삶이 시적 사유가 살아 숨 쉬는 존재의 집으로 귀향해 진실한 삶의 터전을 다시 일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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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존재의 언어 집에 살아보기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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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적 자아’의 회복을 돕기 위해, 심장과 몸을 연결하여 존재의 목소리를 듣는 회복 루틴
첫 단계
‘디지털 침묵을 통한 존재의 청취’이다.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알고리즘이 내리는 맞춤형 정보의 비(스마트폰 알림)를 맞기 전 10분간 오직 자신의 호흡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 클라우드에 접속된 페르소나를 로그아웃시키고, 세상에 던져진 단독자로서의 나를 감각하는 시간이다. 호흡을 통해 깊숙이 들어오는 공기는 데이터 조각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존재의 숨결임을 확인한다.
두 번째 단계
심장 타격과 몸의 공명을 느껴본다. 가슴에 손을 얹고 심장 박동을 직접 느끼며, 분절된 언어들이 만들어낸 불안의 소음들을 가라앉힌다.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은 멀리 있는 관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뛰고 있는 심장의 유한함을 직시하는 몸의 체험이다. “이 박동은 언젠가 멈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가짜 욕망들은 힘을 잃고 내가 진정으로 투신해야 할 ‘본래적 과업’이 분명해진다.
마지막 단계
죽음을 미리 만나고 온 근원적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오늘 하루의 삶을 나만의’시적 언어로 설계하고 기술해본다. 오늘 내 존재가 마주할 진리의 순간을 정리해줄 단 한 줄의 문장을 직접 써본다. “오늘 하루는 XXX 일 것이야” 라는 문구를 시인이라는 생각으로 은유와 비유를 담아 작성한다. 하루를 사는 중간 중간 바쁨을 멈추고 자신에게 이 시적 언어를 다시 들려준다. 이런 언어가 일주일 동안 모아 정리되면 내 존재의 무늬를 새기는 시인의 집이 완성된다.
하루 하루 시인으로 사는 루틴은 알고리즘의 비에 젖어 축축해진 영혼을 말리고, 모래 사막 같던 일상을 단단한 존재의 땅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