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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폭력이 시작되는 근원: 수단과 목적의 전치
모든 폭력이 시작되는 근원:
수단과 목적의 전치
세상의 모든 비극과 폭력은 본래 수단이어야 할 것이 목적의 자리를 찬탈하는 ‘전치’의 순간에서 싹튼다.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전에 “우리가 겪고 있는 세상의 대부분 문제는 수단인 시스템과 기술을 그 자체로 목적인 인간 위에 놓으려는 시도에서 발생한다”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는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할 도구들이 거꾸로 인간을 규정하고 지배하기 시작할 때 인류의 존엄성이 파괴된다는 통찰이다.
이러한 전치의 위험성을 철학적으로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이는 마르틴 하이데거다.
하이데거는 도구로서의 망치를 예로 들어 존재의 방식을 설명한다. 망치가 제 기능을 다하며 수단으로서 충실하게 못을 박고 있을 때, 망치는 사용자의 의식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는 ‘손안에 있음’의 상태가 된다. 망치를 사용하는 사람은 망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수단은 목적을 위해 묵묵히 자기를 지울 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망치가 본래의 기능인 못을 박지 않고 손등을 찍었거나 다른 사람을 헤치는 무기로 전환될 때 망치는 수단이기를 멈추고 존재를 드러낸다. 망치가 부러지거나 그 기능을 상실하여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멈추는 순간, 망치는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런 문제는 도구가 고장 났을 때뿐만 아니라, 도구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 할 때 발생한다. 수단이 스스로를 목적으로 선포하며 존재를 드러내는 그 찰나, 목적이었던 인간은 수단을 보조하는 부속품으로 전락하며 모든 형태의 인간에 대한 구조적 폭력이 시작된다.
이러한 전치 현상은 리더십의 영역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본래 리더십이란 공동체가 약속한 변화와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숭고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리더십 그 자체를 목적으로 숭배하고 우상화하기 시작하면 비극이 찾아온다. 수단이 존재를 드러내어 우상이 된 리더는 더 이상 공동체의 목적을 수행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과시하는 것을 지고의 목적으로 삼는다. 구성원들을 자신의 종으로 생각하고 구성원은 자신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을 설파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리더는 사람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당연한 권리이자 효율적인 통치 수단으로 정당화한다.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할 리더십이 거꾸로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는 것이다.
현대의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 역시 동일한 궤적 위에 놓여 있다. 이들은 인간의 의지를 확장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에이전트로서 존재할 때만 정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인간이 기술이 주는 편리함과 효익에 매몰되어 인공지능을 신적 존재로 추앙하거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숭배하게 된다면, 기술은 인간의 고유한 존재 의미를 말살하는 차가운 흉기로 돌변한다. 알고리즘이 인간의 판단을 대신하고 시스템의 효율성이 인간의 생존권보다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기술이라는 거대한 기계 장치를 돌리기 위한 연료로 소모될 뿐이다. 심지어 최근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전투 로봇을 실험적으로 투입하는 극단적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목적과 수단의 전치는 역사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국가의 안보와 질서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던 군사력이 정권을 찬탈하는 목적으로 변질될 때 군부 독재의 폭압이 발생한다. 경제적 풍요를 위한 수단인 화폐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위해 천륜을 저버리고 생명을 경시하는 참혹한 범죄가 일상화된다. 학문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수단인 학벌과 학위가 인생의 최종 목적으로 둔갑할 때 교육은 성취의 기쁨이 아닌 타인을 짓밟는 무한 경쟁의 전쟁터가 된다. 이처럼 본질을 잃고 비대해진 수단이 목적의 왕좌를 차지하는 순간, 세상은 피할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접어든다.
이 비극적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어머니가 아기에게 보이는 아기 철학과 농부가 자신의 젖소에게 보이는 젖소 철학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는 데에는 어떤 부연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아기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대체 불가능한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아기는 존재함 그 자체로 사랑받으며, 어떤 가치로도 환산될 수 없는 절대적 존엄성을 지닌다. 반면 농부가 젖소를 극진히 보살피고 사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신선하고 건강한 우유라는 결과물을 얻기 위함이다. 젖소는 우유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할 때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만약 우리가 동료 인간을 대할 때 아기가 아닌 젖소로 바라본다면, 상대가 더 이상 우유를 내어주지 못하는 순간 가차 없이 폐기하는 폭력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도 부모가 아이를 아이가 아닌 젖소로 생각하고 양육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젖소 철학을 가진 부모도 말로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고 변명한다. 부부 사이의 폭력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존재의 지위에서 해고해 수단의 지위로 격하하는 순간 부부간의 폭력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기술이 주는 효익과 근시안적 수단에 대한 최적화가 극심해지는 지금과 같은 시점에서 우리는 궁극적인 목적인 존재 목적을 잃고 수단에 해당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수단에 대한 우상숭배에 빠지면 결국 관련된 주변 사람에 대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폭력을 시작한다. 존재목적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 수단과 목적의 전치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세상의 모든 폭압은 결국 존재목적의 상실에서 초래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윤리는 명확하다. 수단과 시스템은 인간을 보좌하는 지위로 내려가야 하며, 오직 인간만이 그 무엇으로도 치환될 수 없는 유일한 목적으로 우뚝 세워져야 한다. 존재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을 삶의 주인으로 세우기 위한 운동장을 만드는 제공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꿈꾸는 세상이다. 이 운동장에 인간을 주체로 세우기 위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헌신해야 할 대상은 지속가능성이라는 공공선에 기여하려는 공동의 목적의식이다. 공동의 목적의식에 대한 헌신이 부족한 사람이 모인 조직은 헌신의 대상이 목적이 아니라 조직이나 조직의 리더로 전락한다. 목적과 수단이 바뀌면 이들 조직이나 리더는 구성원을 억압하는 무기로 전락하고 조직은 비운의 조직으로 전락한다.
이런 존재목적을 가진 온전한 인간이 주인으로 대접 받는 민주주의의 실현이 지금처럼 난무하는 전쟁과 폭력을 멈추는 유일한 길이다. 미국과 이스라엘과 이란이 폭력적 전쟁에 나서는 이유도 이 세 나라가 인간을 온전한 존재로 보는 민주주의 이념을 상실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잃는 순간 이 세 나라는 제왕적 지위를 가지는 리더가 국민을 지배하는 국가로 전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