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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탄력성이 우리를 어떻게 무너트리나? 회복탄력성에 대한 경고

Jul 4, 2026 ·8분 ·jkyoon · 1
회복탄력성이 우리를 어떻게 무너트리나?
회복탄력성에 대한 경고
어제는 (2026년 4월 4일) 이화진성리더십 아카데미(교장 김영주)를 2회차를 진행하면서 진성리더십에 대한 근력, 즉 존재목적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맹목적으로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경우 어떻게 회복탄력성의 함정에 갇힐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이 깊어졌다.
지금처럼 변화와 위기가 상수인 초뷰카 세상에서 방향을 잃고 쓰러져 기진 맥진해진 상황에서 주술가의 만병통치약처럼 등장한 개념이 회복탄력성이다. 심지어 청년들 사이에서는 <중꺽마: 중요한 것은 꺽기지 않는 마음>이라는 회복탄력성을 찬양하는 주술문구가 생겼을 정도다.
사회, 조직, 공동체의 근원적 변화를 위해 진성리더십을 연구하고 설파해온 30년의 시간 동안, 이 회복탄력성 숭배 현상에 대한 불편함이 차곡차곡 쌓여왔다. 회복탄력성에 대한 맹목적 찬양이 오히려 변화가 상수인 초뷰카 세상에서 인간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작동 방식으로 작용함에도 아무도 정면으로 고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복탄력성은 드물게 생명의 원천이 되지만, 보편적으로는 가장 교묘한 형태의 죽음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된다.
두 가지 다른 근력:
회복탄력성이 생겼다는 것은 뇌의 신경망 시냅스 숲에 뚜렷한 회로가 새로 각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그 회로가 어떤 방향으로 새겨졌는가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회복탄력성은 과거의 상태로 복원할 수 있는 힘이다. 과거의 정상적인 상태로 다시 복원하는 근력은 지금처럼 변화가 상수가 된 세상에서는 오히려 감옥이 되어 행위자를 옥죈다.
생사의 고통 속에서 벼티고 버티다 운이 좋아 기사회생한 사람은 자신이 살아남은 알고리즘을 신앙처럼 숭배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자신의 주도적 노력의 산물이든 우연한 행운의 산물이든 상관없이, 그 경험으로 형성된 시냅스 회로는 이후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 세상이 바뀌어도 이 회로는 바뀌지 않는다. 방향성 없이 축적된 힘은 결국 자신을 세상에서 고립시켜가며 서서히 죽음으로 이끄는 독이 된다. 방향 없는 근력은 저주가 되어 부메랑으로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을 파괴하는 원천으로 작용한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를 두 층위로 구분했다.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를 향한 자유(Freedom for)’다. 우리가 삶을 통해 축적하는 근력도 이 두 층위로 나뉜다. 단지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방향 없는 회복탄력성은 프롬의 소극적 자유와 같다. 새장의 문이 열렸다고 해서 새가 온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듯, 단지 역경을 극복했다고 해서 그 근력이 곧 생명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날아갈 방향을 결정하지 못한 채 새장을 나선 새는 광활한 허공이 주는 공포 앞에서 결국 익숙한 구속으로 회귀한다.
회복탄력성이 방향 없이 과거로의 원복만을 의미할 때, 그것은 인간을 과거 지향적 존재로 고착시킨다. 과거에 살아남게 해준 알고리즘을 관성처럼 붙들고 있는 한, 미래가 요구하는 다른 존재 방식으로의 전환은 불가능해진다. 결국 그 회복탄력성은 미래를 향한 도약이 아니라 과거의 감옥을 탈출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물쇠가 된다. 프롬의 향한 자유를 구가하게 만드는 존재목적이라는 삶의 방향이 없는 사람들에게 회복탄력성은 그 자체로 저주다. 목적지 없이 헤매는 이에게 주어진 강인함은, 잘못된 길을 더 멀리 가게 만들어 영영 돌아올 수 없게 하는 재앙이기 때문이다.
회복탄력성이 위험한 이유는 또 있다. 회복탄력성이 자신을 무너뜨린 환경적 요인을 정당화하는 보수주의자 방식으로 작동할 때이다. 자신을 넘어트린 이유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회복탄력성은 자신을 넘어트린 외적 힘의 의도를 묻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회복탄력성은 모든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시키고 인간을 환경의 수동적 적응 기계로 전락시킨다. 개인을 무너트린 사람이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문제를 회복탄력성이 없는 개인의 문제로 돌려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이런 음모에 걸려든 사람들은 점점 외부 세력 중 강한 것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극보수주의자로 만든다. 어떤 체제가 자신을 짓눌러도 그 권력에 복종해가며 살아남는 법을 익힌 사람은, 결국 그 체제를 변혁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적응해야 할 조건으로 수용하게 된다. 적응의 근력이 커질수록 저항의 의지는 소진된다. 근력이 떨어진 개인들은 당장 처리해야 할 시급한 일도 처리하지 못하고 미루는 더 수동적인 사람으로 전락한다. 회복탄력성을 신봉하는 극보수주의자들은 절대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생물학적으로 근육은 뼈에 직접 붙지 않는다. 근육을 뼈에 고정하여 움직임을 실현하는 것은 힘줄이다. 삶에서 진정한 근력이란 단순히 근육의 부피를 키우는 일이 아니라, 힘줄이 지향하는 목적을 향해 구체적인 근력 알갱이들이 맺혀 코디네이션(Coordination)되는 과정이다. 방향성 없는 회복탄력성이 만드는 근력 알갱이들은 파편화되어 있다. 환경이 안정적일 때는 유능함으로 보이지만,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결정적 순간에는 거대한 관성이 되어 발목을 잡는다. 이 관성은 변화를 거부하며 삶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독이 된다.
회복탄력성이 아니라 안티프래질러티(Antifragility):
나심 탈레브(Nassim Taleb)가 제시한 안티프래질러티(Antifragility) 개념은 이 맥락에서 핵심적 의미를 지닌다. 회복탄력성이 외부의 충격을 버텨내고 원래 상태로 복원되는 능력이라면, 안티프래질러티는 충격을 통해 더 강해지고 존재목적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공진화하는 근력이다. 안티프래질러티은 존재목적으로 정렬된 회복탄력성의 근력을 의미한다.
안티프래질러티의 근력을 개발하는 전략은 『#급진거북이(#잉걸북스 2024)』에서 자세히 설파되어 있다. 급진거북이는 안티프래질리티 근력 의 전도서다. 차이와 반복을 통해 자신이 설정한 존재목적이라는 방향과 정렬된 거북이의 근력이 안티프래질러티의 본질이다. 급진거북이는 사악하게 이기주의적으로 살지 않아도 이기주의자의 부분최적화 전략에 대응한 전체 최적화 전략으로 더 나은 삶을 근력을 만드는 Outsmart 전략과 쓰려졌을 때 일어서고 또 일어서야 하는 일어섬의 Outlast 전략을 설파한다. 급진거북이는 눈 먼 골리앗처럼 방향성을 잃은 경우 더 강해질수록 더 위험해진다는 것을 가르친다. 안티프래질러티는 존재목적이라는 힘줄 위에서만 작동하는 다윗의 근력이다.
안티프래질러티 근력의 힘줄을 남드는 것은 어려움에 처해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반드시 일어서야 하는 이유이다. 몸이 무너졌을 때, 마음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마음이 무너졌을 때 정신이 마음과 몸을 일으켜 세우는 힘은 일어서야 하는 이유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안티프래질러티는 목적을 가지고 일어서는 행동을 통해 길러진다. 우리를 넘어뜨리는 힘은 다양하고 통제할 수 없지만, 넘어졌을 때 이유를 가지고 제대로 일어나게 하는 것은 자신이 통제하는 자신의 존재목적에 대한 믿음의 근력이다. 일관된 이유로 근력이 조금씩 차이를 가지며 축적되는 상태가 안티프래질러티다. 차이와 반복의 철학적 의미가 여기서 실천적 형태로 구현된다.
욥과 맹자가 가르치는 생산적 고통:
안티프래질리티의 근력 속에서 모든 고통은 생산적 고통으로 승화된다. 성경 욥기는 이 구분을 가장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서사다. 욥에게 부과된 고통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목적 있는 담금질이었다.
욥은 율법적 무죄함만으로 고통을 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넘어선 존재목적 있는 삶을 요구하셨다. 욥의 회복은 단순한 원상 복귀가 아니다. 그는 율법적 신앙의 틀을 넘어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창조주와의 관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이것이 회복탄력성과 고통을 생산성으로 바꾸는 안티프래질러티 사이의 분기점이다. 존재목적에 대한 약속이라는 드라이버가 있는 고통은 담금질이 되지만, 그 드라이버가 없는 고통은 피해야 할 재앙에 불과하다.
맹자의 고자장(告子章)은 동양의 전통에서 이 진실을 간결하게 압축한다.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사람에게 내리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하며, 그 몸과 살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이 구절의 핵심은 ‘큰 임무’라는 존재목적이 선행한다는 데 있다. 임무 없이 찾아오는 고통은 파괴적 회복탄력성의 재료가 될 뿐이다. 임무가 있는 사람에게만 고통은 성장의 연료가 된다.
진성리더는 존재목적이라는 믿음의 근력으로 고통을 생산적 에너지로 바꾸는 리더다. 진성리더십(Authentic Leadership)의 관점에서, 진성리더가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는 이유는 단순히 강인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약속이 있고 자신은 죽음과 싸워도 이 약속을 지킬 사람이라는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이 약속이 힘줄이 되어 근력 알갱이들을 한 방향으로 정렬시킨다.
회복탄력성이 강한 사람과 안티프래질러티를 가진 사람의 차이는, 결국 힘줄의 방향인 존재목적의 유무에서 결정된다.
“달음박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린도전서 9:26)”라는 선언은 방향성 없는 근력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한다. 목적 없이 축적된 회복탄력성은 ‘향방 없는 달음박질’이 쌓인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변화와 충돌할 때, 모래 위에 쌓은 성이 파도 앞에 속수무책으로 해체되듯 무너진다.
초뷰카(Hyper-VUCA) 환경에서 진성리더십을 추구하는 사람은 묻는다. “어떻게 더 강하게 회복할 것인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무엇을 향해 일어설 것인가”와 “단순히 살아 남기 위한 이유 말고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이유가 있는지?”이다.
존재목적이라는 힘줄 위에 차이와 반복으로 근력 알갱이를 축적하는 사람이 안티프래질러티를 소유한 사람이다. 이들은 역경을 통해 단순히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역경 이전보다 더 깊은 곳에서 더 나은 방향을 향해 솟구쳐 오른다. 빛이 무작위로 흩어지면 아무 힘도 낼 수 없지만, 한 방향으로 정렬되면 쇠를 뚫는 레이저 빔이 되듯, 존재목적으로 정렬된 근력은 세상을 근원적으로 변혁하는 힘이 된다.
우리가 선물처럼 받아들이는 회복탄력성이 트로이 목마가 되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그것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과거를 향해, 환경에의 적응을 향해, 방향 없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강해질수록 더 깊이 과거에 갇히고, 더 완고하게 변화에 저항하고, 더 무력하게 환경에 순응하는 아이러니가 회복탄력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주는 함정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회복탄력성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넘어진 자신이 왜 일어서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 일어서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만이 쌓을 수 있는 존재목적 정렬의 안티프래질러티(Antifragility) 근력이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야 할 때 스마트 하게 넘어지지만 넘어졌음을 쿨하게 인정하고 대신 반드시 일어나는 힘을 통해 만든 근력이다. 근력은 넘어질 때가 아니라 일어서야 할 이유를 가지고 불끈 일어설 때 만들어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 안티프래질러티의 근력을 만든다. 이 근력은 초뷰카 시대에 인간이 길러야 할 진정한 존재우위(Existential Advantage)의 근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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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 Jeongkoo Yoon
About the author

Jeongkoo Yoon · 윤정구

Professor of Management at Ewha Womans University's School of Business. Writing on natural learning, double-loop reflection, and the sociology of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