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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이 소환한 제주의 그림자: 진짜 이름을 마음껏 불러보자!

Jul 4, 2026 ·7분 ·jkyoon · 1
<내 이름은>이 소환한 제주의 그림자:
진짜 이름을 마음껏 불러보자!
가족과 같이 정지영 감독의 4.3 영화 <내 이름은>을 감상했다. 동행한 가족은 이미 두 번째 관람이다. 처음 영화를 보고 하염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이번 감상에서도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떤 이유로 이름 없이 살거나 남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실존의 상실을 의미한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이름에 고유한 경험을 채워 넣을 수 없는 허무한 삶이 반복된다. 자신이 수긍할 수 없는 이유로 매일 매일 원점에서 삶이 다시 리셋되고 처음부터 시작된다. 원점으로 돌아오는 무한회귀라는 시시포스 형벌에 처해진 것이다. 가족도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상황에 저항해 자기 이름을 찾기 위해 투쟁한 경험이 있어서 제 삼의 힘에 의해 이름이 지워진 채로 사는 삶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내 이름은?”
이 물음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제주의 역사를 아는 자만이 느낄 수 있다. 이름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기 위한 단순한 기표가 아니다. 이름은 존재의 증명이고, 기억의 닻이며, 공동체가 어떤 이를 자기 품 안에 두겠다는 선언이다. 산다는 것은 태어날 때 주어진 자신 이름이 붙은 빈 배에 자신의 고유한 삶의 무게를 채우는 과정이다. 그 이름이 지워지고 수만의 이름이 금기의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비극을 넘어, 거대한 사회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집단적 트라우마다. 어느 순간부터 제주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치매환자 연기를 해가며 살아야 했다. 강요된 치매를 현실로 받아들여 반복하니 영화의 주인공 정순처럼 실제 치매 환자가 되었다.
영화가 건드리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제주 4·3이 남긴 상처는 단순한 트라우마가 아니라 집단 그림자(collective shadow)의 전형적 구조를 갖고 있다. 그 구조는 과거형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제주의 일상을 오염시키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병리다.
거적 아래의 구더기:
국가는 4·3의 상처 위에 거적을 덮었다. 거적 위에는 아름다운 제주의 햇빛이 내리쬐었고, 감귤밭과 올레길의 풍경이 그 위에 펼쳐졌다. 그러나 거적 아래에서는 구더기가 생겼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깊이 썩어가며, 더 강력한 힘으로 귀환을 준비할 뿐이다.
집단 그림자가 외부로 향하는 출구를 차단당하면, 그것은 방향을 바꿔 내부를 향한다. 국가권력이 4·3의 진실을 봉인했을 때, 제주 공동체 안의 억압된 공포와 분노와 수치는 외부가 아닌 가족과 이웃에게 투사되었다. 실제 이런 투사의 증거가 지금도 제주의 통계 속에 살아있다. 제주는 현재 청소년 자살과 노년 자살을 포함한 아노미 자살에서 전국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뒤르켐(Émile Durkheim)이 아노미 자살이라 명명했던 공동체의 규범과 연대가 붕괴될 때 발생하는 자기 파괴가 제주에서 유독 깊게 뿌리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족이 붕괴되었고, 이웃이 붕괴되었다. 학살의 현장에서 군인과 경찰이 주민들에게 강요했던 행위가 있다. 서로를 쳐라. 서로를 고발하라.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라. 그 방식은 지금 제주의 학교에서도 살아있다. 아이들이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의 뺨을 때리는 관행은 단순한 학교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75년 전 국가폭력이 공동체의 몸 안에 새겨놓은 기억이 세대를 넘어 전달된 것이다. 트라우마가 문화적 유전자를 통해 세대 간에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치유되지 못한 아픔은 반드시 거적을 뚫고 나온다. 그것이 직접 기억될 수 없을 때조차, 몸의 언어로, 관계의 패턴으로, 공동체의 습속으로 귀환한다.
공동체가 붕괴된 사회에서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해 칼을 돌린다. 제주의 자살률은 집단 그림자가 내부 투사로 전환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참혹한 지표다.
집단적 페르소나의 방호 구조:
연기된 환대
미국 남부를 여행한 사람은 알 것이다. 그곳의 환대는 따뜻하다. 지나치게 따뜻하다. 일본인을 만난 이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무한히 친절하고, 무한히 예의 바르며, 무한히 멀다. 본인은 이것을 진짜 환대(Deep Hospitality)에 가면을 쓴 연기된 환대(Performed hospitality)라 부른다. 흑인이 집단적으로 억압받던 시대의 미국 남부 백인들에게, 무사(武士)들이 책임을 지고 자결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시대의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외부에 드러내는 것은 가장 위험한 행위였다. 특히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외지인 앞에서, 진짜 자아를 감추고 환대의 가면을 쓰는 것은 생존의 기술이었다. 이것이 융이 지적한 집단 수준에서 작동하는 페르소나(persona), 즉 사회적 가면이라는 방호 구조다.
제주에 가면 우리는 이 연기된 환대와 마주친다. 제주 사람들의 환대는 진심이다. 그러나 그 환대의 이면에는, 집단적 페르소나라 부른 방호막이 작동하고 있다. 자신의 진짜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를 집단 무의식의 차원에서 학습한 공동체는, 외지인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내밀면서도 그 안쪽의 문을 결코 열지 않는다. 내가 만난 가족 사에 4.3 사건이 포함된 제주도 원주민들의 표정은 한마디로 웃픈 표정이다. 거적은 외부를 향해서도 쳐 있다. 자신이 겪은 일을, 자신의 가족이 당한 일을, 낯선 이에게 꺼내는 것은 70년간 금기였다. 그 금기는 공식적으로 해제된 이후에도 집단 몸의 습관 속에 남아 있다.
제주의 연기된 환대 뒤에 말해지지 않은 통곡이 있다. 그 통곡을 듣지 못한 채 제주의 아름다움만 소비하는 외지인들은, 제주를 절반만 보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우리가 헌신할 대상이 아니다
4·3을 논할 때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이 학살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를 절대적 가치로 숭배하는 세력이,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의 권력을 통해 자행한 것이다. 5·18 역시 마찬가지다. 공통점이 있다. 두 사건 모두 국가가 국민 위에 올라선 순간 발생했다. 국가가 공동체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 위에 군림하는 목적 그 자체가 되었을 때, 공동체 안의 가장 약한 고리에 있는 사람들이 가늠조차 불가능한 폭력에 노출되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그 답은 국가가 아니다. 제도가 아니다. 권력은 더욱 아니다. 우리가 헌신해야 할 대상은 고통을 생명의 근원으로 받아들여 하루하루를 진실되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공동체이며, 그 공동체가 함께 지어나가는 세상이다. 국가는 그 헌신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일 때만 정당성을 갖는다. 국가가 도구를 넘어 목적이 되는 순간, 그것은 공동체의 빛을 집어삼키는 가장 거대한 그림자가 된다. 4·3이 증거다. 동질성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자행한 폭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주는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고통과 그림자를 더 두꺼운 거적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가지고 거적을 열고 그 안을 상처와 구더기를 직시하는 것이다. 상처를 먹고 있는 구더기를 보는 것이다. 그 구더기가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지를 묻는 것이다.
거적을 여는 순간, 그동안 봉인되어 있던 냄새와 부패와 고통이 한꺼번에 쏟아질 것이다. 모두 같은 날 제사를 지내면서도 제주는 계속 거적을 자신 개인 가족사로 닫아두려 한다. 오랫동안 해결의 기제가 마련되지 못한 제주에게 이 방식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편함이 공동체의 붕괴와 청소년과 노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있다.
거적을 연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제목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에게 “너는 빨갱이가 아니었다”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은 ○○이었다, 이런 이름을 가진 당신은 이름을 가진 누구의 아버지였고, 마찬가지로 이런 저런 이름을 가진 누구의 딸이었다”고 불러주어야 한다. 이름을 복원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교정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던 존재들을 의식의 빛 아래로 소환하는, 심층적 치유 행위다.
이 위로가 밤에 지내는 제사나 살풀이 춤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살풀이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적 감정의 발산으로 소진될 때,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4·3의 아픔은 개인의 한(恨)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구조적 상처다. 따라서 그 치유 역시 구조적이어야 한다.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집단적 치유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 아픔을 특정 지역, 특정 세대의 아픔으로 분절하지 않고,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수용하는 집단적 애도가 있어야 한다. 그 위에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공동의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이어져야 한다.
아픔을 온전하게 치유하는 행위는 억압된 자신의 그림자를 직시하고, 그것을 자기 존재의 일부로 통합하면서, 더 온전한 주체로 다시 서는 것이다. 공동체도 다르지 않다. 4·3이라는 그림자를 자기 역사의 일부로 통합하지 못한 공동체는, 그 통합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계속해서 청소년과 노인을 자살로 잃을 것이다. 없는 것으로 치부된 그림자는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빛이 있는 한 그림자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안고 걷는 것과, 그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다른 길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그 다른 길로의 첫걸음을 권유한다. 거적을 열 용기, 구더기를 직시할 용기, 지워진 이름을 다시 부를 용기, 이런 용기를 통해 제주는 공동체의 치유를 경험하고 진정한 환대의 섬으로 다시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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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 Jeongkoo Yoon
About the author

Jeongkoo Yoon · 윤정구

Professor of Management at Ewha Womans University's School of Business. Writing on natural learning, double-loop reflection, and the sociology of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