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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큰 고통은 왜 생기는 것인가? 전체 최적화 과정에서 요청된 환류

Jul 4, 2026 ·7분 ·jkyoon · 1
우리에게 큰 고통은 왜 생기는 것인가?
전체 최적화 과정에서 요청된 환류
요즈음은 지인들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덕분에 고난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십자가를 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고통은 삶의 일부분이다. 문제를 제대로 푸는 희열보다 못 푸는 경우가 더 많고 이것들이 누적되어 삶을 꼬이게 만드는 고통이 우리가 경험하는 일반적 고통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문제 풀이와 관련된 일반적 고통을 넘어 인간의 존재우위를 구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다른 차원의 고통도 존재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재우위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고통이 쌓여 사건으로 전개되는 고난(Crucibles)은 대부분 다음의 세가지 범주에 속한다. 첫째, 천재지변의 강제된 고난, 둘째가 탐욕으로 정해진 정도에서 이탈할 때 자초되는 고난, 마지막으로 존재목적의 각성이 불러오는 생산적 고난이 그것이다.
어떤 종류의 고난이던 고난은 부분 최적화의 삶이 전체 최적화의 질서를 무너트렸을 때 다시 전체 최적화를 위해 원복하는 환류의 과정이다. 자연에 대한 최적화를 무시하고 인간이 무작위적으로 환경을 다뤄 지구온난화 등을 일으켰을 때 폭우와 가뭄 등으로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려는 자연의 보이지 않는 시도가 발생하고 그 결과로 인간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무작의적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인간 뿐 아니라 자연을 구성하는 한 주체가 과도하게 자신의 생존과 번성을 위해 생태계를 착취할 경우도 임계점을 넘으면 전체 최적화를 위해 재앙을 부과하기도 한다. 인간 세상의 질서도 마찬가지다. 한 세력이 커져 카르텔을 구성하고 이 세력의 부분 최적화를 위해 다른 부분들이 과도하게 희생되는 임계점에 도달하면 반드시 사회의 전체 최적화를 위한 환류가 발생하고 카르텔 세력에게 고난을 부과한다. 검찰공화국을 열망했던 윤석열 카르텔 세력이 계엄 세력으로 전락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난도 이 부류에 해당한다. 정도를 따르지 않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탈로해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입힌 쿠팡의 김범석, 신세계의 정용진, 하이브의 방시혁이 겪고 있는 고통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런 종류의 병리적 고통도 존재하지만 더 최적화된 진실의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생산적 고통도 존재한다. 이런 고통은 존경받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경험하거나 리더들이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이다. 이런 고통을 경험하는 이유는 맹자의 고자장에 다음처럼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사람에게 맡기려 하면
必先勞其心志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苦其筋骨
근육과 뼈를 깍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餓其體膚
몸과 살을 굶주리게 하고
窮乏其身行
생활을 빈곤에 빠뜨려
拂亂其所爲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所以 動心 忍性
이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길러 주기 위함이며
增益 其所 不能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
극심한 부분 최적화를 추구하는 세력 때문에 생긴 극심한 혼란과 혼동에 개입해 지속가능성이라는 공동의 존재목적을 세우고 이를 통해 전체 최적화를 환류시키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생산적 고통이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목적을 세우고 나서는 순간 부분 최적화의 삶을 최고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한다. 존재목적에 대한 지향성이 더 클수록 역풍은 태풍이 된다. 맹자는 이들이 경험하는 태풍을 이들이 지향하는 존재목적에 대한 근력을 시험하고 이들을 리더로 세우는 과정으로 제시하고 있다. 존재목적을 각성하는 삶을 시작했는데 역풍이 몰아치지 않는다면 그 존재목적은 진실이 아닐 개연성이 높다. 결국 이 역풍에 넘어지지만 자신의 존재목적에 대한 약속을 상기하고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과정이 이들이 존재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안티프래질리티의 근력을 만들어준다.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경험하는 십자가 고통은 이런 존재론적 목적이 이끄는 생산적 고통이다. 존재목적이 이끄는 삶에 대한 다짐은 그 자체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다짐이다. 예수의 십자가 고난은 본 칼럼이 제시하는 자초한 생산적 고난의 가장 순수한 원형이다. “나는 스스로 내 목숨을 버리노라. 이를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 10:18). 예수는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십자가의 고통을 자각하고 그 목적이 요구하는 역풍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예수의 십자가는 자초한 존재론적 고난을 상징한다. 역풍을 만들고 이 역풍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선택을 내렸다. 결국은 이런 극단적 선택을 통해 목적의 진정성을 입증했고 진실의 입증을 통해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대부분 성경의 내용은 사실 이런 종류의 존재목적을 증명하기 위한 생산적 고통에 대한 설명이다. 대표적 사례가 욥이다.
욥은 윤리적 율법적 삶에서 탈로한 삶을 살지 않았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나서서 증언한다.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 1:8)이다. 또한 욥의 고난은 윤리적 삶을 이탈한 자가 받는 인과응보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욥이 삶의 목적을 제대로 자각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 목적이 불러오는 역풍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사례도 아니다. 고난이 찾아온 것은 욥의 선택이 아니라 욥이 전혀 알지 못하는 천상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에서 비롯된다. 천재지변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사바 사람들의 습격, 하늘에서 내려온 불, 갈대아 사람들의 약탈, 광야의 폭풍은 자연의 우발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설계된 시험이었다.
욥이 경험하는 고통은 일단 율법적 해석인 인과응보라는 생각에 대한 부정이다.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인과응보적 율법에 갇힌 사람들이다. “네가 고난을 당하고 있으므로 너는 반드시 탈로한 것이다”라는 주장이 세 친구의 논리다. 이들은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으로부터 탈로의 원인을 역추론한다.
욥은 이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욥의 항변은 단순한 억울함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고난과 죄 사이의 자동적 인과 연결을 끊어내는 존재론적 선언이다. 대신 욥은 이렇게 묻는다.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는가? 아니, 더 나아가 의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 있는가?
욥기의 진짜 철학적 도발은 여기서 시작된다. 욥은 고난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고난에 질문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세 친구의 거짓 위로를 거부하고, 잘못을 인정하면 고난이 끝날 것이라는 유혹을 거부하며, 하나님과의 정직한 대면을 요구했다. “내가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노라. 나는 하나님과 변론하기를 원하노라”(욥 13:3). 하나님께 직접 물어보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런 욥에게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넌지시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알려준다. 윤리적 율법적 삶을 넘어서 하나님이 초기값으로 창조한 에덴의 질서가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누군가 신실한 사람들이 나서서 하나님의 뜻인 전체 최적화된 상태로 더 아름답게 재창조해야 필요를 각성하고 이 책무를 욥이 실현해줄 것을 기대한다. 하나님은 욥에게 윤리적이고 율법을 어기지 않고 사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만 이 윤리적이고 율법적 삶에 갇히지 말고 한발 더 나아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을 더 아름답게 창조하는 전체 최적화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문한다.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통해 훈련시키는 근력은 과거의 윤리적이고 율법적인 사람으로 돌아가는 회복탄력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초기값으로 창조한 세상을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안티프래질리티 근력으로 사용하라는 요구다. 하나님은 욥에게 율법적이고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는 근력에 만족하지 말고 자신만의 존재목적을 세우고 공동체를 더 높은 상태에서 최적화 시키는 창조주의 아들의 책무를 가지고 살라고 주문한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런 창조주의 아들로 살 수 있는 잠재적 근력을 보았다.
욥기의 결말은 이를 확인한다. 욥은 이전보다 두 배의 것을 회복한다(욥 42:10). 그러나 이 회복은 순종의 보상이 아니다. 진정성의 귀환이다. 욥의 시냅스에는 고난을 통과한 새로운 경로가 새겨졌다. 고난 이전의 욥이 하나님을 거래적으로 섬겼다면, 고난 이후의 욥은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욥기는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예수의 십자가는 자초한 생산적 고난의 원형이고, 욥의 시험은 강제된 생산적 고난의 원형이다. 두 고난 모두 동일한 결론으로 수렴한다. 고난을 통과한 존재는 고난 이전의 존재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된다. 이것이 맹자의 고자장이 전하는 바이며, 본 칼럼이 말하는 목적에 대한 약속을 실현할 수 있는 근력인 안티프래질리티의 핵심이다.
욥의 고난은 자초도, 탈로도, 우연한 천재지변도 아니다. 존재가 진실한 자에게 우주가 부과하는 존재론적 시험이다. 그리고 그 시험을 진정성으로 통과할 때, 욥처럼 귀로만 듣던 자가 눈으로 보는 자로 변환된다. 귀로만 듣던자는 암묵적 직관으로 사는 것을 뜻한다. 욥이 창조주의 아들로 사는 책무를 위한 안티프라질리티라는 훈련된 직관을 얻었을 때 욥의 세상을 다양한 통찰 (insight outright foresight hindsight)로 볼 수 있는 눈을 얻는다. 눈을 가렸던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세상을 제 눈으로 직관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고통을 통과해 안티프래질리티 근력을 만들어가는 완성된 존재의 모습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존재목적을 세운다는 것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인지한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몸의 경계를 넘어선 전체 최적화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안티프래질리티 근력을 만드는 고통은 필연적 과정이다. 공동체의 공동의 존재목적으로 전체 최적화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고통은 더 배가될 것이다. 경계의 범위와 무관하게 존재목적에 대한 각성 없이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기로 작정한다면 이 사람에게 고통이 찾아올 리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존재목적을 쇄빙선으로 세우고 우여곡절 끝에 고통을 통해 안티프래질리티 근력을 만든 사람들이 얻는 가장 큰 효익은 전체 최적화된 삶의 결과로 지속가능한 성공이 따라온다는 점일 것이다. 더 이상 성공이라는 파랑새를 따라가며 분주하게 삶을 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성공한 사람이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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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 Jeongkoo Yoon
About the author

Jeongkoo Yoon · 윤정구

Professor of Management at Ewha Womans University's School of Business. Writing on natural learning, double-loop reflection, and the sociology of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