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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 문제해결력 Way라는 사고근력
인공지능 시대 문제해결력
Way라는 사고근력
이번 학기에는 소크라테스 북 클럽에서 진성도반들과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같이 읽고 있다. 이번 주에 읽은 <차이의 이념적 종합>이라는 장에는 우리는 왜 문제해결력이라는 사고근력을 획득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들뢰즈와 카다리의 진단을 볼 수 있다.
모든 주체가 세상에서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은 문제해결력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가 가진 문제해결력의 수준을 보고 전문성을 평가해서 시장가치로 보상한다. 개인도 기업도 정부도 마찬가지다. 돈을 주고라도 살 만한 문제 해결력을 가진 주체만 자신이 활동하는 영역에서 성공을 구가한다.
들뢰즈는 이 장에서 문제해결력의 수준에 대해서 진단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질문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조언한다.
들뢰즈의 문제해결에 대한 진단과 창의적 문제해결력에 대한 처방은 본인의 저서 <#황금수도꼭지(샘앤파커스)>에서 다룬 바이킹이 겪고 있는 문제해결 상황과 비슷하다. 책에서 바이킹은 초보적 문제 해결력으로 시대에 적응해가며 사는데 어려움을 겪는 현대인을 상징한다.
한 바이킹이 물을 얻기 위해 이웃 마을을 약탈하던 중 그토록 갈망하던 황금수도꼭지를 발견한다. 자신의 마을에서는 물을 얻기 위해 10리를 걸어야 하는데 숨어서 지켜보니 이 수도꼭지는 틀기만 하면 물이 콸꽐 쏟아진다. 그는 환호하며 도끼로 수도꼭지만을 덩그러니 잘라와 자신의 막사 벽에 못 박아 고정한다. 그러나 수도꼭지를 아무리 비틀어 돌려도 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바이킹은 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을까? 바이킹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까?
이런 질문에 대해 비슷한 수준의 문제해결력을 가진 사람들은 전문용어를 남발해가며 그가 작동법을 모르거나 수도꼭지의 품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더 화려하고 비싼 황금으로 수도꼭지를 도금하는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근본적인 실패가 수도꼭지라는 최종 결과의 수준, 즉 표면적 현상의 층위에서만 문제를 정의한 데서 파생되었음을 여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물을 얻기 위해서는 대지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마그마 같은 에너지를 품은 관정이 있어야 하고, 그 관정의 압력을 지상으로 끌어올릴 파이프라인이라는 혁신적 알고리즘이 연결되어야 한다. 이 모든 생성의 메커니즘을 거세한 채 마지막 종착지인 수도꼭지만을 움켜쥔 채 문제를 정의했으니, 제대로된 해결에 도달할 방법이 없다.
들뢰즈는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가장 깊은 관정의 수준 속에 숨겨져 있다고 설명한다. 문제를 올바르게 정의하고 해결하려면 가장 깊은 심층의 관정에서 시작해 혁신의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고 최종적으로 수도꼭지라는 표면적 지층으로 발현시키는 삼단계의 존재론적 층위를 이해해야 한다. 사유의 순서 또한 마찬가지다. 먼저 대지 아래의 잠재적 영역인 관정을 향해 “왜 이 물이 지상으로 터져 나와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목적의식인 Why를 질문해야 한다. 관정 안에서의 내적 으르렁거림과 이념적 문제가 규정되고 나면, 비로소 그 에너지를 현실화할 배치이자 경로인 파이프라인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How 질문이 도출된다. 마지막으로 이 구조적 통로를 타고 흘러나온 구체적인 결과물로서 What의 수도꼭지를 어떻게 편리하게 디자인할 지를 물어야 한다.
세계 최고수준의 문제해결력을 보여준 아이슈타인도 자신은 문제를 근원적으로 Why 수준, How 수준에서 제대로 정의하는데 시간의 80%이상을 사용한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문제가 정의되면 질문도 이 수준에 맞춰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창의적으로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제안한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도 문제의 수준에 맞는 질문을 만들지 못하고 정해진 답만을 요구하는 표층적 수준에서 답이 정해진 질문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기업과 개인들이 직면한 비극은 Why와 How라는 심층의 질문을 모조리 스킵한 채 처음부터 What이라는 죽은 기표의 지층에서 질문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타인의 해답을 복제하는 재현의 함정에 빠져 있으니, 아무리 수도꼭지를 금으로 도금해 본들 내부의 역동적인 도약이나 생성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금 광풍처럼 불고 있는 인공지능에 대한 호들갑을 떠는 사람 대부분은 문제를 제대로 정의하고 창의적 솔루션을 제시하는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는다. 인공지능(AI)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가지든 말든 이들이 사고하는 수준은 바이킹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대다수의 기업과 사람들은 AI가 가져올 근원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나 조직의 실존적 이유(Why)를 묻지 않는다. 이를 아키텍처와 인간의 협업 루틴으로 어떻게 내재화할 것인가(How)에 대한 고민도 생략한다. 그저 황금수도 꼭지를 화려하게 도금하기 위해 어떤 색을 써야하는지에 대한 질문만 반복한다. 이들은 “어떤 AI 툴을 도입해야 하는가”, “어떤 결과물이 당장 나오는가”라는 마지막 결과 수준의 What만을 다그치듯 질문할 뿐이다. 이들의 질문과 욕망은 인공지능을 마지막 결과 수준에서 단순복제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진정한 문제해결력을 담보하는 사고근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제대로 된 학술논문을 생산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훌륭한 논문은 언제나 “왜 이 연구가 이 시대에 필요한가”라는 Why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Why에 대한 가장 깊은 수준의 들끓는 마그마의 흐름을 파악해 지금 자신이 처한 문제에 기존의 연구와는 다른 질문을 하고 이를 통해 다른 대안적 가설을 도출하고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어떤 고유한 연구 방법론과 알고리즘을 설계할 것인가”라는 How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완성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결론과 새로운 시사점이라는 What의 완결구조를 도출해 낸다. 기존의 답을 가진 사람들의 질문인 So What이라는 마지막 질문에 답하고 나면 삼단계의 인과적 흐름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이런 사고의 과정과 사고 과정에 대한 훈련을 통해 제대로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는 논문이 탄생한다.
이런 문제해결의 사고력을 가진 기업이 문제와 질문을 다루는 방식도 비슷하다. 기업의 문제 문제 해결력은 기업 고유의 ‘Way’를 가지고 있는지의 문제다. 기업의 Way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Why에서 시작해 How의 질문을 도출해내고, What을 자연스럽게 도출해내는 세 개의 질문이 일관되게 정렬되어 나타난 사고력을 의미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유행이나 단기적 지표(What)에 흔들리지 않고, 조직이 해결해야 할 세상의 본질적인 문제(Why)를 정의한 뒤, 이를 조직 내부의 제도와 일하는 루틴이라는 독창적인 파이프라인(How)으로 일관되게 연결해 내는 시스템적 구조를 가질 때 비로소 그 기업의 Way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Way를 가진 기업들만 자신들이 약속한 존재목적에 대한 체험을 자신의 서비스와 제품에 녹여서 파는 최고 수준의 문제해결력을 보인다.
들뢰즈는 회사든 개인이든 창의적 문제해결력을 온전히 갖춘 사고근력을 갖추기 위해 사유 패러다임 자체를 관정에 대한 Why 질문에서 시작해, How 질문에 답하고, What은 질문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만드는 코페르티쿠스적 변혁을 주문한다.
들뢰즈는 이런 문제해결력의 근력을 길러내기 위해 완전히 유목민적으로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이미 정해진 정답을 맞추거나 남이 만들어 놓은 수도꼭지의 외양을 흉내 내는 정주민의 노예적 사유에서 벗어나야 창의적 문제해결력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의 표면 아래에서 언제나 우글거리고 있는 잠재적 강렬함과 차이들의 장을 대면할 수 있는 지질학적 사유인 Why에서 시작해, How로 연결시키고 How가 자연스런 What으로 이어지는 사유의 근력을 길러야 한다. 사유를 고정된 명사나 박제된 결과물로 취급하지 말고, 끊임없이 변화를 밀어 올리는 동사적 흐름이자 생성의 알고리즘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표면의 도금공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내면의 뜨거운 마그마인 Why의 관정에서 출발해 자신만의 How의 파이프라인을 발명해 내 자신만의 Way를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적인 유목민이 될 때, 기업과 개인은 비로소 마르지 않는 샘물을 뿜어내는 진짜 황금수도꼭지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