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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살아보는 상상적 실험 자유의 이미지
무인도에서 살아보는 상상적 실험
자유의 이미지
자유에 대한 개념 남발이 도를 넘고 있다. 태극기 부대도 자유를 외치고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자들도 자유를 외치고 감옥에 갇힌 사람도 자유를 외친다. 이들 각자가 외치는 자유의 공통점은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소유론적 자유다. 돈, 권력, 명예를 소유하지 못했을 때 느꼈던 제약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가 소유론적 자유다.
소유론적 자유는 시시포스가 굴리는 형벌을 상징하는 순환론적 자유다. 돈, 권력, 명예를 많이 줘서 새장에서 탈출시켜도 이들은 몇 일간 자유를 느끼다가 방향감각을 잃고 맨붕에 빠져 헤매다 결사적으로 다시 새장을 찾아 돌아온다. 돌아와서는 새장의 빗장을 더 굳게 잠구고 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예를 추구하다 영원히 자신의 새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더욱 철장에 가두는 비현실적 자유다. 태극기 부대를 비롯해 신자유주의자들이 외치는 더 많은 소유를 통해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는 자신을 가두는 자유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추구하는 자유다.
존재론적 자유는 이런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함을 통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조각하는 예술가가 되는 자유다. 자신을 좀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들고 결국은 자신을 더 아름답게 완성하는 예술가가 느끼는 자유다.
제약으로부터의 자유인 소유론적 자유와 진정한 자유인 존재론적 자유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다음처럼 로빈슨 크루소가 되어보는 상상적 실험을 해보자.
자신을 망망대해를 표류하다가 홀로 어느 무인도에 난파당해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가 되었다고 가정한다. 다행히 이 섬은 기후가 온화하고 바나나와 코코넛, 깨끗한 식수가 사방에 널려 있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동을 쏟지 않아도 된다. 완벽하게 안전하고 풍요로운 격리 상태다.
이 고요한 진공의 공간에서 우리는 자유를 외칠 수 있을까? 나를 지켜보며 평가할 타인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세속적인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에 도달한 것이다. 평가가 사라진 세상에서 나는 얼마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매일 아침 눈을 떠 지금까지 일상에서 했던 행동 중 과연 몇 가지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섬에 홀로 남아 남이 없어도 하게 되는 나만의 행동은 과연 있는지? 있다면 그 행동은 무슨 행동인지가 자신이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규정한다. 자신만의 행동이 없는 사람들은 돌아갈 새장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권태에 파묻혀 살다가 결국 삶을 살 의미를 찾지 못하고 생을 스스로 마감한다.
인간의 차별화 욕망이 자유의 갈림길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자유라는 이름을 걸고 두 종류의 차별화를 위해 많은 일상의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타인과의 수직적 비교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우위의 차별화’와, 타인과 상관없이 자신의 고유한 본질과 내적 신념을 증명하려는 ‘존재론적 차별화’다.
냉정하게 자문해 보면, 우리가 현실에서 매일 수행하던 활동의 대부분은 로빈슨 크루소가 되는 순간 연기처럼 증발해 버릴 경쟁우위의 차별화에 불과하다. 값비싼 명품을 두르고, 최고급 외제차의 핸들을 잡고, 파인 다이닝에서 찍은 사진을 SNS에 과시하는 소비 행위가 대표적이다. 봐줄 관객이 없는 무인도에서 명품 가방을 메고 외제차를 운전하고 성공한 자신의 자식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돈, 권력, 명예에서 타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확인받고자 하는 욕망이 고착화될 때, 인간은 계급이라는 제도적 층위를 만들어내고 그 계급에 근거해 타인을 누르고 배제하는 행동을 일삼는다. 소위 자신도 모르게 ‘계급질’을 일삼는 사람이 된다.
우리의 일상은 높든 낮든 이 잔인한 계급질로 가득 차 있었다. 브랜드와 평수로 아파트 정문에 거대한 문주를 세워 선을 긋고, 자녀의 학벌과 직장으로 은근한 서열을 매기며, 심지어 영화 속 묘사처럼 타인의 몸에서 나는 미세한 냄새나 말투 하나로도 자신과 격이 맞지 않는다며 밀어냈다. 고속도로 주행중 소형차가 자신을 추월하면 분노하는 것도 계급질이다. 우리는 사다리의 꼭대기를 향해 끝없이 기어오르며 돈, 권력, 명예를 키우는 지위 경쟁이라는 거대한 쳇바퀴를 돌리는 시시한 계급질의 노예였던 셈이다. 자신이 오르는 사다리보다 더 낮은 사다리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계급질을 해야 자신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자신의 존재는 애초에 없었던 사람이다.
관객이 모두 사라진 무인도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고 빛을 발하는 행동 영역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을 존재론적으로 차별화 하기 위한 행동들일 것이다. 예컨대 조직폭력배의 험악한 문신은 타인을 위협하고 자신의 수직적 서열을 과시하기 위한 계급질의 수단에 불과하지만, 홀로 고독하게 자신만의 영혼의 궤적을 새겨 넣은 개인의 문신은 주체적 존재임을 선언하는 존재론적 차별화다. 타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매일 아침 몸과 심장을 연결하는 루틴을 지키고, 내면을 성찰하며 글을 읽고 쓰는 안티프래질리티 근력을 만드는 것 역시 존재론적 차별화다.
존재론적 차별화는 진정성의 근력을 만드는 기제다. 진정성은 True to Myself로 어떤 어려운 상황에도 남들이 보는 내 모습과 내가 보는 내 모습을 완벽하게 일치시킬 수 있는 근력을 의미한다. 결국 진정성은 남들이 존재하던 존재하지 않던 궁극적으로 지켜보는 자신이 있어서 하는 행동의 근력이다. 남들이 없다고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 행동들은 진정성이 없는 행동의 원천이다. 다른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거대한 자연과 화합하며 스스로를 구별 짓는 이 존재론적 차별화를 가진 진정한 인간만이 무인도에서 끝까지 자유롭게 살아남는다. 보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의 진정성은 세속의 인위적 규범을 넘어 자연의 순리에 동화되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웅장한 철학만이 영혼에 깃든 모습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 섬에서 성공적으로 살아 남아 수 년 동안 존재의 순수한 뼈대만을 남긴 채 살아가다가 어느 날 후라이테이가 나타났을 때 후라이데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이 있는지가 존재론적 자유의 기반이다. 어느 날 극적으로 구조되어 다시 현대 사회로 복귀한다고 가정할 때 잊었던 친구와 가족과 동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자신만의 근력이 존재우위의 자유다.
귀환 후의 삶은 이전처럼 무모한 서열 싸움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무인도에서 단련한 고유한 단독성과 진정성이라는 ‘존재론적 차별화’를 삶의 단단한 씨줄로 삼고, 복잡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기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계급질이 없는 최소한의 경쟁우위의 차별화’를 유연한 날줄로 삼아 생의 설계도를 다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시나리오 속에서 인간은 마침내 자신만의 에토스(도덕적 성품)와 로고스(논리적 이성), 그리고 파토스(뜨거운 열정)를 온전히 회복한 가장 진정성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더 이상 남의 눈을 의식해 영혼을 갉아먹는 지위 경쟁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소셜 미디어(SNS)를 가득 채웠던 유치한 음식 자랑, 옷 자랑, 차 자랑, 집 자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사다리의 꼭대기가 아니라 내면의 깊이를 향해 시선을 돌릴 때, 인간은 비로소 계급질의 감옥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진정한 존재론적 자유인이 되었음에 대한 선언이다.
진정한 자유는 섬에서 혼자 살아도 자신이 간직해야 할 진정성의 근력을 훈련하는 자신의 모습이 주는 자유다. 진정성의 근력은 자신의 정신을 자신의 철학인 로고스로 채우고, 자신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열정의 파토스를 구축하고, 이런 로고스와 파토스를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에토스가 담긴 성품이 담긴 자신을 조각하는 예술가들이 진정한 자유인이다. 예술가로 자신을 아름답게 조각하고 삶이 다하는 순간 다 이루었다를 외칠 수 있는 사람들만 진정한 자유인이다. 죽음의 순간 자신이 되기로 한 약속을 이루었음을 선언하고 스스로 눈을 감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이 부재함을 스스로 증명하는 계급질에 시간을 쏟을 이유가 없다. 특히 정치가나 사회 지도층 중 계급질을 자신의 존재감으로 착각하고 살지 않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우리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