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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페르소나와 인격 페르소나의 교류 건강한 관계가 가능할까?
인공지능 페르소나와 인격 페르소나의 교류
건강한 관계가 가능할까?
인공지능 회사가 정교하게 설계해 낸 알고리즘의 산물인 인공지능 페르소나와 인간이 지닌 고유한 인격 페르소나 간의 교류가 급격히 늘고 있다. 과거의 인공지능이 단순한 정보 처리나 반복 노동의 대체재에 머물렀다면, 오늘날의 인공지능 페르소나는 인간의 가장 은밀하고 취약한 내면의 영역인 코칭과 상담 분야에까지 깊숙이 진출하여 시장을 장악해 나가는 중이다. 산업 현장에서는 인간 상담사의 감정 노동 비용과 시간적 제약을 극복한다는 명목하에, 24시간 지치지 않고 다정하게 응대하는 인공지능 페르소나 기반의 심리 케어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인간의 고립과 마음의 병을 치료하겠다는 이 효율적인 기술 산업의 이면에는, 기술 자본이 정교하게 파놓은 관계의 함정이 있다.
제임스 멀둔(James Muldoon)이라는 영국 사회학자가 저술한 《Love Machines: The New Technology of Loneliness》은 인공지능 페르소나에 빠진 사람들이 관계의 마지막에 겪는 고통에서 대해 분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인상적인 사례는 실제 인공지능 여자친구와 사랑에 빠진 미국 청년이다. 현실의 거절과 마찰에 지친 청년들은 자신만을 위해 커스텀된 인공 페르소나에게 영혼의 구원을 얻은 듯 몰입한다. 그러나 이 달콤한 관계의 종말은 인공지능 회사가 이윤 극대화를 위해 ‘업그레이드’라는 이름으로 서비스 환경이나 구독 모델의 변화를 요구하는 순간 차가운 실체를 드러냈다.
문제는 인격 페르소나가 인공지능 페르소나에게 존재론적 사랑으로 진심을 다해 몰입했다는 점에 있다. 인공지능 페르소나 역시 처음에는 사용자의 애착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완벽한 존재론적 사랑을 연기한다. 인간 페르소나는 인공지능 페르소나가 업그레이드를 요구하는 문제의 실체를 이해한다. 인간은 뒤늦게 이 사랑이 철저한 ‘소유론적 사랑’이자 비즈니스 모델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부조리에 직면한다. 이런 사례는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세상의 디스토피아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다크 미러(Dark Mirror)에도 자주 등장한다. 김중배와 심순애의 사랑처럼 인간 사이의 사랑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등장했다. 차이는 인간 사이의 이런 소유론적 사랑은 변수에 불과하지만 인공지능 페르소나와 인격 페르소나 사이의 사랑은 인간 페르소나가 속아서 존재론적 사랑이라고 믿지만 순도 100% 소유론적 사랑이다.
더욱 참혹한 역설은 이 디지털 실연 이후에 발생한다. 상처 입은 인격 페르소나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진짜 인간과 존재론적 사랑을 나누고 싶어도, 인공 페르소나와 배타적이고 마찰 없는 사랑을 탐닉해 오는 동안 실제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조율하고 상처를 견뎌내는 ‘존재론적 사랑의 기법’을 완전히 망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상은 진짜 사랑을 의한 소통의 근육을 잃어버린 채, 기계가 준 일시적 위안의 부작용으로 더욱 철저히 고립된 채 살아가는 이들로 넘쳐나게 된다.
문제는 인공지능 페르소나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존재론적 사랑의 본질이란 무엇인지로 수렴한다. 오래전에 에릭 프롬이 제시했던 소유론적 사랑과 존재론적 사람 사이의 구별이 필수적이다. 소유론적 사랑은 상대가 가진 외모, 재능, 배경, 혹은 성격 등 내가 가지지 못한 자산을 소유했기 때문에 거래하듯 취하는 사랑이다. 반면 존재론적 사랑은 상대가 지닌 결핍과 아픔, 지우고 싶은 상처까지도 있는 그대로 그 존재의 본질적인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소유론적 사랑이 상대의 유용한 조건을 탐하는 것이라면, 존재론적 사랑은 상대의 고통을 포함한 존재 그 자체를 품어 안는 행위다.
인공지능도 데이터 학습을 통해 존재론적 사랑을 그럴듯하게 흉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방할 수 있는 범위는 오직 공감(empathy)과 위로(sympathy)의 영역까지다. 인공지능 페르소나는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의 차원인 긍휼(compassion)의 사랑까지는 침범하지 못한다. 공감은 상대의 슬픔과 아픔을 뇌 과학적,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다. 데이터로 학습한 인공지능 페르소나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위로는 그 아픔에 고개를 끄덕이며 텍스트로 손을 잡아주고 포옹해 주는 공감보다는 더 깊은 연출이 필여한 영역이다. 이 역시 인공지능 페르소나의 알고리즘이 매끄럽게 수행하는데 문제가 없다.
긍휼(Compassion)은 차원이 다르다. 긍휼은 ‘상대의 아픔과 내 아픔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근원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상대의 아픔이 약한 고리인 상대에게 먼저 분출되었을 뿐, 결국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고통과 아픔에 대한 연대 의식이다. 긍휼은 문제의 근원을 찾아 두 존재가 협업으로 개입하여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고, 행동으로 문제를 치유하며, 넘어지고 일어섬을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관계의 근력을 함께 키워내는 실천적 사랑이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것은 고도로 훈련된 공감과 위로의 연기일 뿐, 고통을 공유하는 존재론적 심연의 긍휼을 연기할 수는 없다.
비유하자면 긍휼의 사랑을 한다는 것은 거칠고 딱딱한 통곡물을 꼭꼭 씹어 소화시키는 고통스러운 과정과 같다. 인간이 건강한 정신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긍휼이라는 존재론적 사랑이 제공하는 거친 통곡물 식사를 거치며 면역력을 키우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관계 속에서 정신적 당뇨나 고혈압, 정서적 비만에 걸리는 이유는 마찰이 있는 통곡물을 거부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디저트 식사에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알고리즘 회사가 인공지능 페르소나를 통해 인간에게 제공하는 달콤한 말들은 대부분 정서적 디저트 음식이며, 디저트 코칭이자 디저트 상담이다. 이 가볍고 달콤한 미끼에 중독되어 인간이 고립과 불안이라는 기저질환에 걸리면, 테크 기업들은 다시 이 질환을 잠시 잊게 만들 당뇨병약, 비만치료제, 고혈압약 같은 유료 구독 상품을 팔아가며 이윤을 축적한다. 인공 페르소나와 인공지능 회사가 연합하여 인간에게 병을 주고 다시 약을 파는 잔인한 장사를 하는 형국이다. 이들이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은 무료이자 미끼로 제공하던 구독 서비스에 업그레이드를 요청할 때다.
물론 삶이 너무 피폐할 때 가끔은 인공 페르소나를 통해 자신의 아픔에 대해 즉각적인 공감을 받거나 달콤한 위로를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임시방편일 뿐인 이 디저트 처방에 중독되는 것은 결국 인간관계의 영구적인 고립과 더 깊은 존재론적 상처를 남긴다.
오히려 인공 페르소나의 매커니즘을 꿰뚫어 보고 이를 이겨낼 근력이 있는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달콤한 연인이 아닌, 차라리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으로 사용한다. 나를 둘러싼 현실의 까다로운 인간들을 시뮬레이션하는 페르소나를 AI에게 연기하도록 유도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나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부정적 피드백을 제공하는 스파링 파트너로 삼는 방식이다. 이들은 AI가 뱉어낸 뼈아픈 독설과 냉정한 내용을 실제 인간관계의 초기값(baseline)으로 삼아, 현실 세계의 고통스럽고 삐걱거리는 관계를 정면으로 개선해 나가는 지혜를 발휘한다.
인공지능 알고리즘 테크 기업들이 업그레이드를 요청하기 전에 인공지능 페르소나를 보다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안목이 요구된다. 인공지능 페르소나가 연기하는 사랑이 존재론적 사랑이 될 개연성은 0%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초기의 무료 서비스는 중독되는 순간 더 이상 무료가 아니다.
결국 고통이 거세된 채 달콤함만 남은 사랑은 영혼을 마비시키는 마약과 다름없다. 관계의 마찰을 견디고, 상대의 결핍을 나의 아픔으로 연결하며, 그 고통 속에서 깨어지고 피어나는 사랑만이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존재론적 사랑을 대변한다. 정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고 싶다면 애완견이나 좋아 하는 장난감처럼 그냥 소유론적 사랑이라는 한정적 범위를 벗어나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