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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Difference) vs 다름(Distinction) 들뢰즈 다시 읽기

Jul 4, 2026 ·10분 ·jkyoon · 1
차이(Difference) vs 다름(Distinction)
들뢰즈 다시 읽기
진성도반들과 소크라테스 북 클럽에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통곡물 씹어 먹듯 일인칭 읽기를 하고 있다. 일인칭 읽기란 고전을 이해해서 고전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고전을 자신의 일인칭 맥락에서 이해하고 다른 일인칭 관점에서 읽는 도반들과 읽은 것을 간주간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이다. 공유를 통해 자신의 이해를 맥락화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관(정신모형)을 설계하고 조형해간다. 일인칭 고전 읽기는 진성리더십 도반들만의 고유한 읽기 방법론이다.
이번에 읽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5장이다. 5장은<감성적인 것의 비대칭적 종합>이라는 들뢰즈 철학의 핵심 중 핵심을 다룬다. 들뢰즈가 차이와 다름을 어떻게 구별하고 주체성을 발휘해 어떻게 다름이 아닌 차이를 만들어가는지를 해설하고 있다. 핵심 내용을 여기에도 소개한다.
들뢰즈는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혼동하는 <차이와 다름>을 구별하기 시작한 최초의 철학자다.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싸움은 차이와 다름을 구별하지 못하는 몰이해에서 발생한다.
들뢰즈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으로 이어지는 전통철학은 모두 절대 진리인 이데아를 상정하고 이 이데아를 얼마나 잘 근접해서 모사하는지를 두고 진리의 가치를 만들었다고 가정한다. 또한 이데아의 본질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진리 자체인 동일성(Identity)이고 이 동질성을 원형으로 삼아, 이 원형에서 내적 변이를 일으키는 정도에 따라 유사성(Similarity; Within Variance)으로 나누고, 이것과는 개념적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이 출현할 때는 이원론의 대립(Opposition; Between Variance)으로 명명한다.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전혀 다른 세계이지만 외형적으로 같아 보이는 것을 먼저 동일성의 관점에서 이해된 것을 지렛대로 삼아 이해하는 방식을 유비(Analogy; Modeling)라고 부른다. 이런 4가지 동질성 철학이 허구적 개념 세상을 만들어 같음과 다름에 대한 싸움터를 만들었다고 전제한다. 동일성에서 달라짐의 정도에 따라 가치를 판단하고 이 동질성 범주에 속하지 못한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재단하고 폄하하는 동질성 철학이 지금의 다름에 대한 편견에 가득찬 세상의 원흉이다.
세상을 재현하려는 개념의 메카니즘인 동질성, 유사성, 이원론, 유비에 대한 우상숭배가 다름을 차이와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고 세상을 차이가 아니라 다름을 중심으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갈등장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각자가 가진 개념의 종합인 세계관의 차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 다름에 대한 부정적 편향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 들뢰즈의 결론이다.
5장은 다름과 다른 차이에 관한 철학의 종합판이다.
5장 1절: 강도적 차이와 현상의 탄생 (차이는 잡다가 아니다)
인간의 타성적인 상식이나 양식은 눈앞에 무질서하게 흩어진 자극이나 파편들을 ‘잡다(雜多)’라고 규정하고 여기에 동질성의 범주를 부여해 임의의 질서를 만든다. 이런 질서는 차이와 생성을 만드는 질서가 아니라 동질성의 기준에 따라 임의로 분류한 죽은 질서다. 근대 칸트 철학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은 이 무질서한 먼지 더미들을 인간의 이성이나 고정된 개념이라는 ‘하나의 틀(동일성)’로 묶어서 정리해야만 비로소 존재론적 의미가 생긴다고 보았다. 이미 발현된 상식과 양식을 토대로 죽은 질서를 보여하는 것을 철학으로 규정했다.
들뢰즈의 차이는 잡다가 아니다. 사물이 현실에 겉모습을 드러내기 전, 그 존재의 가장 깊은 심층에는 온도, 압력, 밀도, 속도와 같이 더 이상 양적으로 쪼갤 수 없는 순수한 힘의 단위인 ‘강도(Intensité)’가 존재한다. 세계는 외부의 주인이 정리해 주어야 할 지저분한 혼돈(Chaos)이 아니라, 이 강도적 차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 속에서 미분적으로 결합하여 직조해 낸 정교한 ‘잠재적 질서’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여진 잡다한 연필, 종이, 책, 지우개는 문구류라는 이름을 붙여 정리해 주어야 질서가 생기는 단순한 ‘잡다’에 불과하다. 반면, 겉보기에는 고요해 보이는 달걀(Egg)의 내부 상태를 보면 결코 무질서한 혼돈이 아니다. 그 안에서는 눈, 코, 입이라는 현실적 형태가 나타나기 전, 세포들이 고유한 생명 구조를 갖추기 위해 서로 밀고 당기며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 역동적인 긴장 상태가 바로 존재를 밑바닥에서부터 스스로 조직하는 ‘차이들의 정교한 시스템(강도)’이 드러내는 진짜 모습이다.
5장 2절: 비대칭적 종합과 강도의 이중성 (강도, 질, 외연의 차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건은 높은 곳과 낮은 곳,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같은 불균형(비대칭)의 상태에서 출발한다. 에너지가 완전히 똑같은 대칭 상태에서는 그 어떤 생성도 일어날 수 없다. 서로 다른 강도의 차이들이 격렬하게 만나 소용돌이를 일으킬 때 비로소 에너지가 흐르고 새로운 현상이 창조되는데, 들뢰즈는 이 역동적인 탄생 과정을 ‘비대칭적 종합’이라 부른다.
여기서 강도의 기묘한 이중성이 드러난다. 강도는 현실의 구체적인 크기(외연)와 눈에 보이는 성질(질)을 가진 물질 세계를 눈부시게 빚어내지만, 막상 사물이 완성되고 나면 자기 자신을 그 결과물 뒤로 쏙 감춰버리는 속성을 지닌다.
100도의 뜨거운 물과 영도의 얼음이 만나는 순간을 가정해보라. 온도의 극심한 불균형(비대칭) 때문에 열이 이동하며 맹렬한 기포와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이 소용돌이가 바로 존재를 출현시키는 힘의 원천이자 강도다. 그러나 이 격렬한 드라마가 끝난 뒤 완벽하게 미지근해진 물을 마주할 때, 우리 눈에는 그저 ‘물 500ml(외연/연장)’라는 수학적 부피와 ‘미지근함(질)’이라는 평온한 성질만 남는다. 완성된 결과물이 자신을 낳아준 뜨거운 강도의 원인을 은폐하고, 인간의 뇌는 이 평평한 껍데기만 보며 세상이 원래 정적이고 고정된 곳이라 착각하게 된다.
5장 3절: 깊이와 주름의 미학 (안주름과 바깥주름의 차이 / 연장과 깊이)
우리가 자로 재고 숫자로 측정할 수 있는 3차원 기하학적 공간인 연장(Extension)이 나타나기 전, 그 심층에는 모든 강도적 차이들이 얽혀 있는 원초적 공간인 ‘깊이(Profondeur)’가 자궁처럼 존재한다. 들뢰즈는 존재의 안과 밖이 단절된 벽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이를 ‘주름’의 형상으로 설명한다. 이미 기성사회의 제도나 매뉴얼, 물리적 신체처럼 겉으로 굳어져 드러난 영역이 바깥주름이라면, 날것의 사유와 열정, 잠재적 이념이 숨 쉬는 영혼의 심층은 안주름이다. 안주름과 바깥주름이 얇은 막을 통해서 주름을 교류하는 동학이 온주름 운동이다. 차이와 반복은 이런 안주름 안주름 안의 온주름, 바깥주름이 서로 역동적으로 순환하고 교차하는 역동적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안주름과 바깥주름을 종이접기의 원리에 비유해 설명해보자. 평평하고 매끄러운 한 장의 색종이를 정교하게 접기 시작하면 안쪽 면(안주름)과 바깥쪽 면(바깥주름)이 역동적으로 동시에 형성된다. 여기에 공기를 넣으면 안주름이 안으로 사라지고 바깥주름에 따라 외형이 형성된다. 또한 바깥 주름은 외부의 거대한 환경이나 시대적 대전환(AX 등)이 나에게 주는 거친 자극들을 통해 안주름이 되기도 하고 다시 바깥주름이 되기도 한다. 차이와 생성을 만드는 것은 기성 매뉴얼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만의 독창적인 문제의식과 본질적 맥락으로 치열하게 접어 넣는 ‘안주름(내면성)’을 통해서다. 그리고 이 단단하게 접힌 안주름을 다시 매일의 행동과 창조적인 루틴을 통해 세상 밖으로 멋지게 펼쳐내는(Dépli) 과정이 곧 ‘바깥주름(신체와 실천)’ 운동이다.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 주름을 멈추지 않고 접고 펼친 생성을 위한 율동의 결과물이다.
들뢰즈에게 주체성이란 자신만의 고유한 안주름을 만들어 이것을 바깥주름의 형태로 생성해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자신만의 고유한 안주름(밀알)을 형성하지 못한 사람이 남들이 이미 바깥주름으로 만들어 놓은 형태를 동질성에 근거해 따라하는 것은 주체적이지 못하다. 안주름이 없이 외형을 만든 사람들은 씨앗 없는 수박이거나 뿌리없는 죽은 인공나무일 뿐이다.
5장 4절: 존재를 지배하는 두 가지 숫자 (기수와 서수의 의미)
인간의 타성적인 상식은 세상을 오직 아파트 평수, 시험 점수, 자산 규모, 직급의 높낮이처럼 이미 완성된 결과물들을 줄 세우고 계량화하는 기수(基數)적 가치로만 재단하려 든다. 기수의 세계에서 모든 단위는 언제나 똑같이 대체 가능하고 쪼갤 수 있는 동일성의 세계다. 그러나 존재의 진짜 심층을 지배하는 것은 순서와 단계, 그리고 차원 전제의 질적 도약을 나타내는 서수(序數)다.
게임의 최종 스코어나 통장 잔고의 액수는 기수(1,2,3)에 불과하다. 반면, 물이 온도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다가 100도라는 결정적인 변곡점(특이점)을 통과하는 순간, 액체에서 기체로 존재의 차원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는 도약의 순서는 바로 서수(1st,2nd,3rd)의 영역이다. 우주의 깊이 속에서 강도들이 이러한 서수적인 단계의 소용돌이(드라마)를 일으켰기 때문에 비로소 기수적으로 측정 가능한 물질 세계가 탄생할 수 있었다. 참된 사유는 눈앞의 계산 가능한 기수적 껍데기를 뚫고 들어가, 온몸으로 통과해 내는 서수적 사건의 리듬을 회복하는 것이다. 안주름을 형성하는 서수적 가치를 키우는 사람들은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나, 오늘과 다른 내일의 나를 만들기 위해 영원회귀의 실험을 반복해가며 차이를 만든다.
5장 5절: 차이의 예찬과 생성의 도약 (차이를 긍정한다는 것 / 베르그송 비판)
강도의 가장 위대한 본질은 바로 ‘차이를 긍정하는 것’에 있다. 이는 차이를 언제나 “A는 B가 아니다”라는 식의 결핍이나 극복해야 할 적대적 갈등으로만 바라보았던 헤겔식 변증법(부정과 대립)을 완전히 전복한다. 강도는 남과 비교하여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꿈틀거리는 독특성(Singularity)과 불균형 자체를 창조의 원동력으로 온전히 찬양하고 뿜어낸다.
들뢰즈는 흐르는 내면의 시간인 ‘지속’을 말한 베르그송을 깊이 존경하면서도, 시간(지속)과 공간을 완전히 분리해 버린 그의 이분법적 단절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지속을 현실의 연장(물질 세계)을 직접 눈앞에 빚어내고 번역하는 뜨거운 강도의 엔진으로 리모델링함으로써, 매 순간 상식을 깨부수고 새로운 미래의 차이만을 영원히 출현시키는 영원회귀의 대드라마를 완성한다. 긍정적 차이를 만들고 이런 차이를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영원회귀가 차이와 생성의 본질이다.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악기들이 저마다 내는 서로 다른 음색과 불협화음의 긴장감은 제거해야 할 오답(부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 비대칭적 차이들을 격렬하게 해방하고 긍정할 때 가장 웅장하고 전율 돋는 마스터피스가 탄생한다. 들뢰즈가 말한 차이의 긍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기성사회가 짜놓은 획일적인 정답에 나를 끼워 맞춰 스스로를 결핍된 존재로 부정하지 않고, 내면의 깊은 심층에서 나만의 고유한 서수적 루틴과 뜨거운 열정(강도)을 출현시켜 내 삶이라는 무대를 영원한 생성의 축제로 만드는 일이다.
들뢰즈는 다름을 극복하고 차이를 만들어내는 주체성의 과정을 안주름을 바깥주름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문제는 안주름은 보이지 않는 뿌리이거나 빙산의 밑동이다. 많은 사람들은 안주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없어도 되는 것으로 치부하고 남들이 바깥주름으로 만들어낸 결과를 재현해 모사하고 이 재현이 얼마나 동일한지를 주장해가며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고 폄하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일에 앞장선다. 자신의 존재가치(Self Esteem)를 고양시키려는 노력은 인정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규정한다. 정말 자신을 고양하려면 자신만의 안주름을 만들고 이것을 바깥주름의 형태로 만드는 농부의 주체성이 필수적이다. 이런 차이와 반복을 통해 만들어지는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나라가 만들어지는 주체성을 잃을 때 모두가 먼저 만들어진 답을 복사하기 위해 혈안이 되고 세상은 결국 잡다한 복사품으로 가득차게 된다.
진성리더십의 측면에서도 주체성은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자신만의 진본을 만드는 과정이다. 자신의 존재목적을 자신의 몸, 마음, 정신에 밀알로 심어(안주름을 만들어) 자신만의 에토스 자신만의 파토스, 자신만의 로고스(바깥주름)로 형태를 만든 사람이 진본을 보유한 사람이다. 진성리더십에서는 안주름이 바깥주름으로 형태를 드러내는 임계점인 경쟁우위라는 지평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안주름을 바깥주름으로 형태화하는 존재우위라는 씨줄이 경쟁우위라는 날줄을 뚫고 나올 때 존재를 인정받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진성리더는 자신만의 안주름을 통해 진본을 만들기 위해 매일 차이를 반복해가며 사는 삶을 진정성 있는 삶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존재우위와 경쟁우위의 직조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자신만의 특이점을 만드는 근력이 진성리더가 행사하는 주체성의 근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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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들뢰즈는 기업에서 벌어지는 DEI 운동에서 D-> E -> I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꼬집는다. Diversity(다양성)은 차이를 만드는 안주름인 포용(Inclusion)이 만들어졌을 때 바깥주름으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주름을 만들 수 있는 포용적 가치가 허용되지 않은 곳에 이미 만들어진 다양성을 억지로 끌어들여도 다양한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안주름을 만드는 포용이 문화적으로 허락될 때 다양한 강도를 가진 사람들이 들어와 자신만의 주체성으로 자신을 발현시키는 Equity가 가능해지고, 이런 집단적 과정을 통해 더 높은 곳에 다양성이 바깥주름으로 발현된 세상이 자연스럽게 생성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업에서 DEI 운동이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성 운동의 본질이 DEI 프로세스가 아니라 IED로 전환되어야 하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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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 Jeongkoo Yoon
About the author

Jeongkoo Yoon · 윤정구

Professor of Management at Ewha Womans University's School of Business. Writing on natural learning, double-loop reflection, and the sociology of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