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영기자가 뉴스타파를 통해 방영한 기자와 부동산이란 2018년 6월 28일 방송분을 보고 강남좌파에 대항하는 강남우파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이들의 존재기반을 이해하게 됐다.
최경영기자의 분석툴은 지식사회학이라는 프래임을 이용한다. 지식사회학은 우리의 이념이나 철학이나 평소의 주장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적 장소나 삶의 배경이라는 존재구속성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 사람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를 정확하기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경험을 가지고 살았는지의 과거와 현재를 분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어떤 사람의 주장이 자신의 존재구속성에 의해서 완벽하게 이해될 때 그 주장은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 시키기 위한 것이지 공적진실성은 사라진다는 것이 지식사회학 분석의 핵심이다.
최경영 기자가 분석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2018년 6월 현재 관훈클럽에 기자로 등록되어 있는 1054명이다. 관훈클럽에 기자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은 각 언론에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는 기사를 쓸 수 있는 중견기자들이거나 간부급 기자들이다. 1054명 중 주소를 밝힌 사람들은 949명이고 이중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은 700명, 이 700명 중 강남 3구에 거주하는 기자는 305명으로 43.6%였다. 이들 중 강남 재건축 아파트를 가진 사람은 45%였다. 강남 3구를 제외한 각 구에 거주하는 기자들의 분포도 조사했는데 금천구에 거주하는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또한 강남에 거주하는 305명의 순서를 언론사별로 조사했더니 우리가 알고 있는 조중동 순서인 것으로 밝혀졌다. 2020년 현재 강남 3구의 인구가 184만명이고 서울시 인구가 1013만명이니 전체 서울시 인구중 강남 인구의 비율은 18%이다. 조중동 중견기자라면 강남구에 살 확률이 일반사람이 강남구에 살 확율보다 3배정도 높다.
결국 최경영 기자에 따르면 강남우파의 실체는 조중동 중견기자와 간부급 기자들이라는 것이 요지다. 이들의 학벌과 가정환경, 자녀의 강남학벌까지 분석의 변수로 넣으면 이들의 강남우파로서의 동질성의 강도는 더 강해진다.
강남의 부동산 문제가 언론에 의해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이들 중 자신이 존재구속성을 벗어나서 대한민국을 걱정해가며 정론을 펼치는 기자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변이를 뚫고 조중동이 이끄는 기득언론들이 비슷한 색깔의 일관된 논조를 펼치고 있다면 이들의 주장은 자신의 존재구속성을 벗어난 정론으로 보기는 힘들다. 부자들이 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자신의 지금까지 삶과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보다는 부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국가의 철학과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들도 정론으로 자리잡으려면 강남이라는 존재구속성을 떠나 금천구의 사는 사람들도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마치 금천구에 사는 기자도 기자이기 때문에 이들도 논조에 동의할 것이라는 가정으로 글을 쓴다면 이 글들은 자신의 배경을 숨기기 위한 파당적인 정치적 주장일 뿐이다.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르지만 지식 사회학이 존재구속성을 통해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례이다. 어떤 사주가족이 성추문으로 문제를 일으킨 기억(존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이 언론이 최근 발생한 성추문의 잘못에 대해 뜬금없이 비난하는 기사를 쏱아낸다면 이 기사들은 뭐 뭍은 개가 뭐 뭍은 개를 욕하는 꼴이 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성추문 사실에 대해 물타기(window dressing or green washing)하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들의 주장을 100%로 신뢰하지 않는다. 존재구속성에 의해 다 설명되기 때문이다. 이 언론이 과거의 잘못을 자복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런 주장을 편다는 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고 자승자박일 뿐이다. 정론이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구속성을 벗어나서도 상식적 보편타당성이 인정되는 미래를 위한 주장일 경우이다.
물론 조중동 기자분들 중에서서 정론을 펼치는 기자분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나 조중동이라는 큰 배경의 입장에서 독자들이 이들의 주장을 이해한다면 이런 강남우파의 존재구속성에서 벗어나기 힘든다. 이들의 기사가 이들의 존재구속성에 의해서 다 설명이 된다면 이들의 주장을 정론으로 보기 힘들다. 자신의 정파성을 숨겨가며 기사를 통해 자신의 정파를 옹호하려는 속셈을 지닌 정치인들과 다를 바없다.
언론개혁의 방향도 분명해보인다. 자신의 존재구속성을 벗어나지 못해 이것으로 정치적 파당을 나누고 이것을 마치 정론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의 피리소리나 나팔소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신 다양한 배경의 기자들이 협업으로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나라의 미래를 위해 더 평평한 운동장을 만드는 것을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이런 비전을 가진 진성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언론이 개혁되어야 언론이 시대를 이끄는 정론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