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11-23 09:55
[N.Learning] 낯설고 험한 세상에 스스로 다리가 되다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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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험한 세상에 스스로 다리가 되다
초뷰카시대 근원적 변화
빅데이터 어낼리틱스가 평소 내가 주로 쓰고 있는 글의 주제와 글을 위한 검색 내용을 간파해 나를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같다. 오늘 아침 AI는 뜬금없이 사이먼과 가펑컬의 노래가 내가 들어야 할 첫곡으로 제안해왔다. 예전에 좋아했지만 오랫동안 듣지 못한 곡이어서 좀 심각하게 듣다보니 놀랍게도 오늘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해주어야 할 메시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낯선 세상에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s)"는 변화의 문제가 초유의 관심사로 떠오른 낯선 세상에서 자신이 남들이 딛고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되어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불후의 명곡이다.
우리는 어떻게 파도가 넘실대는 불확실성의 망망대해를 무사히 건너 미래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는 사이먼과 가펑컬의 노래 가사대로 누군가는 먼저 자신의 맨몸을 던져 불확실성의 망망대해에 다리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사이먼과 가펑클이 주로 노래했던 1960년대에는 변화가 남들이 선택한 길을 따라 선택할 수있는 변수였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누군가 선구자가 나서서 다리를 만들 때까지 기다렸다 건너도 충분히 생존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변화가 상수인 초뷰카시대에는 이것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언제 큰 파도와 해일이 자신이 있는 자리를 덮칠지를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초뷰카시대는 스스로 불확실성의 망망대해로 뛰어들어 다리를 건설하고 스스로 건설한 다리 끝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바다로 뛰어들어 다리를 만드는 작업을 지속해야 한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만의 잔잔한 바다를 찾을 때까지 길을 잃지 않고 다리 건설이라는 근원적 변화의 여정을 완수해야 한다.
불확실성의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것은 낯설고 자살행위처럼 보이지만 그 자리에 머물다 쓰나미에 덮쳐 죽는 고통은 더 힘든 일이다. 초뷰카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사이먼과 가펑컬의 노래에도 나오듯이 미래라는 희망의 등대에서 보내는 불빛에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다리를 만들기 위해 물에 뛰어드는 수밖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초뷰카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근원적 변화는 자신만의 잔잔한 먼 바다를 찾아내기까지는 멈출 수 없는 여정이다.
초뷰카시대를 산다는 것은 불확실성이 건네는 낯섬과 마주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낯섬과 마주해가며 자신의 몸을 던져 스스로 다리를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가 끝난 후 바다에 뛰어드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잔잔한 바다는 우리를 향해 찾아오지 않는다. 낯선 바다에 직접 뛰어들어 잔잔한 바다를 찾아 다리를 만들어가는 것이 초뷰카시대의 공부다. 삶이 낯설지 않다면 이미 공부를 멈춘 것이다. 길게는 사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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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초뷰카시대는 본인의 저서 <초뷰카시대 지속가능성의 실험실: 애터미>에서 묘사하는 현시대의 변화상황을 묘사하는 키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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