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4-03 16:47
[N.Learning] 전치된 국가와 국민의 위치 노자의 국가론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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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치된 국가와 국민의 위치
노자의 국가론
21세기 신냉전 시대를 불러온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국가를 논리적으로 국민의 위에 놓거나 최소한 동일시하는 권위주의적 리더가 일으킨 것이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은 국가를 앞세워 국민을 억압하는 형태의 신권위주의와 이런 국가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탈권위주의와의 전쟁이다.
이번 전쟁에서도 신권위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들의 명단이 드러났다. 2022년 3월 유엔총회서 '러시아 침공규탄 및 즉각 철국 요구' 결의안을 상정했을 때 전체 193개 회원국 중 141개국이 찬성했고, 북한, 러시아 등이 반대했고 중국 이란이 기권했다.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 국민 앞에 국가를 앞세워서 통치하는 신권위주의 국가를 신봉하는 나라였던 셈이다.
신권위주의 국가론자들의 주장은 진부한 이원론적 순환론이다. 이들은 항상 식민통치 시절 나라 잃은 설움을 상기시켜가며 국가가 없는데 국민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국가가 있는지와 없는지 사이에도 건강한 국가, 쇠락하는 국가, 망하기 직전의 국가 등등 N개의 다양한 선택지가 있음에도 이들 선택지는 깡그리 무시되고 단지 있는지와 없는지만 논지로 삼아 역으로 국민들을 위협한다.
국민 앞에 국가를 앞세우는 나라의 지도자들을 들여다보면 권위주의의 신봉자들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국가의 이익은 결국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생명을 국가와 동일시한것이다. 이들에게 국가는 자신의 카리스마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다. 이들 마음 속에 진정한 국가는 없다. 우리도 군부독재 시절 국가를 내세워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군인들에 위해 오랫동안 감옥에 투옥된 상태로 살던 고통스런 경험이 있다. 이때도 예외없이 군부 독재자들은 항상 국민 앞에 국가와 국익을 내세웠다. 아쉽게도 이들의 연기에 속아 넘어가 당시에는 국가와 국익은 이들의 집권유지를 위한 명분이었음을 깨달지 못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역사를 되돌아보면 국익을 앞세워 국민을 단압한 독재자들의 마음 속에 한번도 제대로 된 국가는 없었다.
국가와 국익을 앞세운 권위주의 리더가 일으킨 전쟁과 탄압의 절대적 희생자들은 항상 민간인과 국민이다. 실제 이런 신권위주의론를 추종하는 푸틴같은 카리스마 리더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민은 33%이 난민이 되었고, 민간인 7천명, 양국군인 20만명이 희생되었다. 극단적으로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자 히틀러가 나치국가를 내세워 유태인을 학살했던 때도 참극의 피해자는 무고한 양민이다. 이런 학살에 부역자로 동원된 독일인들도 따지고 보면 국가주의의 희생자들이다.
이런 시대착오적 국가론에 경도된 지도자들에게 제대로 된 국가론을 가르친 학자가 노자이다. 노자는 제대로된 국가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백성 아래에서 역할을 묵묵하게 수행할 수 있을 때 제대로 된 국가임을 강조했다. 제대로 된 국가란 백성들 앞에서 나서는 국가가 아니라 백성들 밑에서 국민들이 생생지락할 수 있는 삶의 플랫폼으로서의 수단적 역할에 충실해야 해야한다는 철학을 설파했다.
실제로 노자의 도덕경 17장을 보면 다음 구절이 나온다.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공성사수, 백성개위아자연)
(리더가 제대로 리더십을 발휘해서)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면 백성들은 말할 것이다. 이 모두가 (국가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이룬 것이다.
국가와 임금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고도 임금이 의도했던 변화의 상태를 구성원들이 성취하게 하는 상태가 노자의 '무위자연' 리더십이자 무위자연 국가론이다. 국가와 리더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백성의 삶 속에 배태되어 최상의 변화를 일으킨 상태이다.
노자의 국가론에 따르면 요순시대가 제대로 된 국가가 작동되던 태평성대의 모범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을 성인으로 부른 이유는 백성들이 실제로 부른 고복 격양가 때문이다. 고복 격양가는 백성들이 '자신들이 배를 두드려가며 부르는 노래로 요순시대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격양가를 불렀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 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정치 지도자들이 정말로 국익을 생각한다면 국가를 앞세워가며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신권위주의가 아니라 국민들이 생생지락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국가를 어떻게 설계해야할 지를 고민해야한다. 지금도 충분히 늦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의 펀더먼탈이 흘러가는 구조를 보면 이미 우리가 목격했던 일본 자민당 정치지도자들의 국익을 앞세운 권위주의 때문에 잃어버린 일본 30년의 전철을 따라가고 있다. 국가가 국민 삶의 플랫폼이 아니라 국민 앞에 나설 때 국가는 알게 모르게 국민 생생지락을 향한 삶에 가해자가 된다.
요순임금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무의에 따라 자연스럽게 순리와 도에 따른 정치를 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제왕의 힘이 작용하는지조차 몰랐다. 노자의 국가론에서 도는 현대적 리더십 용어로 목적이다. 요순시대 임금님들은 목적이 앞에서 이끌게 하고 자신은 목적과 백성 밑에서 일하는 스튜어드십을 발휘했다. 백성을 주인으로 세우고 자신과 국가를 국민 아래에 놓는 서번트 리더십을 발휘했다. 백성이 주인이 되어 생생지락이 실현되는 플랫폼으로 국가를 실현했다.
무위자연과 정반대 국가론에 앞장서고 있는 리더들이 소위 신권위주의 아이콘인 푸틴과 시진핑 김정은이다. 이런 신권위주의적 국가론을 주창하는 리더가 지도자가 되면 모든 공은 국가와 동일시되는 리더가 챙기고 모든 잘못은 국민과 백성에게 돌려진다. 내노남불은 우리가 원조가 아니다.
노자철학을 현대철학으로 접목해 부활시킨 하이데거는 국가와 같은 사물이나 제도가 모습을 드러낼 때는 사물이나 제도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이고 결국 이런 상황에서 드러나는 국가나 사물은 폭력적인 모습이라고 경고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망치라는 사물로 못을 제대로 박을 때를 상상해보면 하이데거의 주장이 이해된다. 망치가 제대로 못을 박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때 망치의 사용자는 망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망치의 사용자가 망치라는 사물의 존재를 인식할 때는 망치가 못을 박기보다는 손등을 찍었을 때이다. 사물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 흉기로 전락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국가라는 제도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제대로된 국민의 생명과 안정을 지켜주는 울타리이자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 국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태원 참사처럼 국가가 모습을 드러낼 때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을 때이다. 이때 국민들은 묻는다. 이것이 국가냐?
대통령이 참사를 대하는 태도나 평소 국익을 내세워 자신을 변호하는 태도를 볼 때 조마조마하다. 우리 지도자에게 푸틴과 시진핑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불안일까? 어렵게 벗어났던 권위주의 독재국가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를 우려하는 것이 나만의 기우였으면 한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사수하려는 것은 국가를 넘어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자신을 맡긴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존엄이다. 제대로된 리더라면 국가가 이런 생명과 존엄위에 군림하지 않고 주인인 국민을 향해 모습을 드러내가며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없도록 국가의 울타리와 국가의 플랫폼을 처음부터 혁명적으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 특히 국익을 앞세워 국민위에 군림하려는 태도는 푸틴, 시진핑, 김정은, 유신독재와 같은 권위주의 리더십으로 회귀하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