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4-03 17:41
[N.Learning] 아브라함의 디아스포라 부러진 믿음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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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디아스포라
부러진 믿음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교도들에게 공통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서로에게 이교도일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똑같이 믿음의 아버지로 환대받을 수 있었을까?
아브라함은 75세가 되던 해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향으로 삼고 살던 메스포타미아의 어느 지역을 떠나 가나안으로의 디아스포라를 시작한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향을 떠나 실향민이 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통해 아브라함이 배운 것은 환대의 본질이다. 이방인으로 사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토박이들의 동질성에 의해 포획되기를 거부하면서도 이들 토박이로부터 환대를 얻어내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은 오랜 기간의 이방인 삶을 통해 토박이들이 이방인인 자신을 환대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이들로부터 토박이 고향사람인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지위를 성취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 75살이 넘은 고령의 나이에 스스로가 오랫동안 다양한 민족의 이방인으로 사는 타자체험을 시작해 환대의 본질을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을 전파 시키는 사역을 맡기기 전에 시험을 보게 했다. 최초의 시험은 75세 되던 해에 이방인에 대한 환대에 대한 배움을 얻기 위해 디아스포라를 감행하라는 명령이었고 마지막 시험은 100세가 넘은 나이에 시행되었다. 백세에 얻은 자식 이삭을 번죄의 재물로 바치라는 명령이다.
백세에 얻은 자식 이삭은 아브라함 가족을 번성시킬 생물학적 씨앗이다. 번식력이 끊어진 아브라함이 자신의 상황을 핑게 삼아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지 않기로 작정한다면 생물학적 DNA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을 이긴 것이다. 이 시험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울타리가 생물학적 가족을 넘어설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지금처럼 도덕 수준이 높아진 시대에 이 시험을 보면 많는 사람들이 통과하겠지만 가족이 삶의 전부였던 청동기 시대에 이런 수준 높은 시험에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혈연관계가 없는 이교도에게도 사랑과 환대를 베풀 수 있는 하나님의 울타리를 세우는 <믿음의 아버지> 사역을 맏겼다.
혈연적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공의로운 세상을 확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혈연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는 믿음의 울타리를 세우는 사역을 통해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사후에도 이런 <믿음의 울타리>를 세울 수 있는지를 시험해 믿음을 전파시킬 후계자를 정했다.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명명하고 이들에게 혈연을 넘어 믿음을 공유하고 실천하는 신가족의 울타리로 공의의 세상을 세우는 임무를 맡겼다. 믿음의 울타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 울타리 안에서 혈연적 가족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을 넘어 영적 안정감을 느껴가며 공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임무를 수행한다.
아브라함이 통과한 시험은 믿음의 강도를 판단하기 위한 시험을 넘어서 살아있는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다.
바뀌어 가는 세상에 맞춰 울타리를 세우는 능력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믿음이다. 살아 있는 믿음에서는 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믿음의 강도가 너무 강하면 믿음은 부러진다. 부러진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믿음은 나침반과 같다. 살아 있는 믿음은 살아 있는 나침반처럼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서 떨림을 통해 북쪽을 찾아낸다. 나침반의 강도가 너무 강해 진북과 너무 벗어나 있으면 나침반은 떨림을 멈추고 부러진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부러진 나침반은 죽은 나침반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젊었을 때는 살아있는 나침반으로 많은 선한 영향력을 만들어낸 분들이 어느 순간 믿음의 강도만을 강조하다 자신의 나침반을 부러트리고 추한 인물로 추락하는 현상을 목격한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낮선 이방인과 만나 환대의 떨림을 유지하는 믿음만이 살아 있는 나침반이다. 서로에게 환대의 공명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죽은 믿음이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추앙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이 강도를 넘어서 환대의 떨림이 있는 살아있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믿음은 변화해가는 세상에 사람들에게 환대의 떨림으로 공명을 만들 수 있는 믿음이다. 살아 있는 믿음은 복음에 대한 믿음이 아픈 자신의 마음과 몸을 일으켜 세운 상태다. 죽은 믿음은 성경귀절을 많이 외우고는 있지만 몸과 마음이 성경귀절과는 따로 살고 있는 믿음이다. 아무리 강한 믿음도 믿음의 뿌리인 아픔에 대한 긍휼감을 상실하면 반드시 고사당해서 부러진다. 아픔에 대한 긍휼감은 이방인에 대한 진정한 환대를 통해서 복원된다.
개신교가 수축되어가는 것은 믿음의 강도만을 강요하다 나침반을 부러트린 것이 이유이다. 교회에서는 여전히 성경에 나왔다는 이유로 현실적으로 믿지 못할 일을 들이대며 이것을 믿는지를 가지고 믿음을 강도를 측정한다. 이런 세속적인 행태가 지금과 같은 초연결 디지털 세상에 얼마나 위험한 행태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분당우리교회가 30개의 교회로 분리해서 각자의 디아스포라를 시작한다는 뉴스에 눈이 갔다. 믿음의 정도를 강조해가며 성전을 키우고 신도수를 늘리는 신자유주의 이념에 오염된 교회를 벗어나 아브라함이 되어 자신을 비우고 성전의 디아스포라를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떨림이 살아 있는 믿음을 증거한 것이다.
이방인에게도 환대받는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다. 이런 환대를 위해 자신이 먼저 고향을 떠나 디아스포라를 감해해가며 이방인의 아픔을 환대하고 치유하는 모습이 살아 있는 믿음의 전형이다. 동일성의 고향에 비유되는 자신의 성전과 공간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낮춰가며 낮설게 디아스포라 하는 삶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나침반이 떨림을 유지하게 만들라는 가르침은 예수의 "다시 태어나라"는 명령과도 일치할 것이다. 사도 바울의 "우리는 매일 죽는다"라는 메시지도 세상에 맞춰 믿음을 공진화 시키고 이를 통해 죽어가는 믿음을 부활시켜 울타리를 새롭게 세우라는 명령이다.
예수와 바울이 이 시점에 다시 부활해서 세속적인 교리에 따라 운영되는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목사안수 시험을 치룬다면 과연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부러진 믿음의 나침반이 시험의 기준이 된다면 당연히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과 디커플링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