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7-15 08:18
[N.Learning] 삼인칭 믿음과 일인칭 믿음 주체의 부활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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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칭 믿음과 일인칭 믿음
주체의 부활
한국에서 미국에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타야만 한다. 현대의 항공기술 수준을 볼 때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 사고가 날 확율은 거의 없다. 비행기를 타야 미국에 제시간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다는 믿음은 모든 사람이 믿는 삼인칭의 객관적 믿음이다.
하지만 내가 실제 비행기를 탈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다. 삼인칭 믿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주관적 일인칭 믿음이 나의 행동을 좌우한다. 비행기에 대한 드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고소공포증도 있고, 공황장애도 있을 경우 다른 모든 사람은 비행기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어도 나는 비행기를 타고 안전하게 미국에 도착할 수 있다는 일인칭 주관적 믿음이 없다. 삼인칭 믿음과 일인칭 믿음이 충돌한다면 미국에 가고 싶은 열망이 아무리 커도 이 열망을 실현할 방법이 없다.
삼인칭 믿음은 통상 믿음 Belief이라고 표현하고 일인칭 믿음은 신념 Faith라고 칭하기도 한다. 삼인칭이던 일인칭이던 믿음은 그자체로 기여하는 바가 크다. 믿음만 있어도 믿음의 대상이 나에게 미칠 불확실성이 제거되어 심리적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비행기에 탑승하는 사건처럼 믿음이 있다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일인칭 믿음인 신념의 작용이다.
아무리 모든 사람이 믿는 삼인칭 믿음이 강해 이것이 단단한 현실로 다가온다 해도 이런 현실에 대한 나자신의 일인칭 믿음이 없다면 자신을 주체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삼인칭 믿음은 인지적 믿음인 반면, 일인칭 믿음은 내 몸을 움직여 행동으로 진실을 입증하게 만드는 신조다. 지행격차는 삼인칭 믿음은 충만하더라도 정작 나를 일으켜 세우는 일인칭 믿음이 부재할 때 생긴다. 내가 주인이자 주체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은 삼인칭 믿음이 일인칭 믿음으로 전환되어 삶아 있는 믿음으로의 근력을 획득했을 때이다. 삼인칭 믿음은 과거와 현재 눈에 목격되는 것에 대한 믿음이지만 일인칭 믿음을 나를 통해 미래가 증거될 것이라는 미래의 진실에 대한 믿음이다.
기독교인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한라산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예수를 믿는 것이 삼인칭 믿음이라면 한라산 존재에 대한 삼인칭 믿음과 구별되지 않는다. 한라산에 대한 삼인칭 믿음처럼 예수를 삼인칭 믿음으로 믿는다면 생명없는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가 내 몸에 부활해 살아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예수에 대한 믿음은 일인칭 믿음으로 존재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 예수가 우리의 몸과 마음 속에 씨앗으로 부활해 우리를 통해 세워지는 진실 사건의 주체가 될 때 우리는 예수를 온전하게 일인칭으로 믿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사건을 믿어도 이 믿음의 씨앗을 받아들여 자신의 몸을 통해 부활시켜 부활을 주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면 삼인칭 믿음만 있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삼인칭 믿음은 있지만 일인칭 믿음이 없어서 두 믿음사이에 디커플링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선데이 크리스쳔이라고 부른다.
삼인칭 믿음과 일인칭 믿음은 토양과 씨앗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두 믿음은 우리 삶에서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토양에 관한 믿음인 삼인칭 믿음은 우리에게 심리적 안정의 울타리를 제공해 운신의 폭을 넓혀준다. 하지만 아무리 큰 운신의 폭을 가지고 있어도 내가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인칭 믿음은 이런 심리적 안정의 울타리 안에서 나를 진실의 증거이자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씨앗을 가졌다는 믿음이다. 삼인칭 믿음은 건강한 삶의 울타리이자 필요조건이지만, 일인칭 믿음은 이 울타리 안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주인으로 일으켜 세워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무늬를 만들고 이 무늬를 통해 자신을 진실의 증거로 세우는 행동을 결정한다. 객관적 현실을 알지만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행동의 결여는 삼인칭 믿음만 있고 일인칭 믿음이 없을 때이다. 일인칭 믿음으로 전환하는 노력없이 공부만 해서 지행격차만 커진 경우다. 토양만 있고 살아 있는 믿음을 키울 수 있는 씨앗은 없는 경우다.
일인칭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 주체적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각성하고 스스로가 작가가 되어 자신 삶의 대본을 직접 쓴다. 일인칭 주체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자연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진리는 깨달을 수 있어도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자기 삶의 진실은 깨닫지 못한다. 삼인칭 믿음이 인지적 믿음이라면 일인칭 믿음은 믿음의 씨앗이 자신의 몸이라는 토양을 뚫고 자신을 통해 발현시킬 근력을 결정한다. 자신을 통해 진실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인류의 진보는 삼인칭 믿음을 넘어 일인칭 믿음을 실현시킨 사람들이 주도해왔다. 일인칭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 진실이란 발견한 목적을 자신을 통해 현실에서 실현시킨 결과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일인칭 믿음이 이끄는 주체적 삶을 복원하는 것은 기독교에서도 중요한 과제다. 성경에 담겨 있는 복음의 말씀이 단순히 삼인칭 믿음에 멈춰있다면 원칙만을 철저하게 강조하는 깐깐한 교장선생님 처럼 유연성이 없는 성경주의자, 교회주의자, 율법주의자가 된다. 기독교인에게 일인칭 믿음이란 이 복음을 자신의 몸을 통과시켜 자신을 통해 복음이 새롭게 증거되는 부활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근력을 의미한다. 예수는 나병환자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가며 이런 기적은 너희들이 믿고 있듯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삼인칭 믿음을 넘어서서 복음이 너를 통해 증거가 되는 너 자신에 대한 일인칭 믿음 때문에 스스로 일어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삼인칭 믿음을 넘어서서 복음의 씨앗이 우리의 몸의 토양에 발아되어 생명의 나무로 탄생해 결실을 만든 사건을 진실의 사건으로 생각했다. 예수는 삼인칭 믿음이 일인칭으로 전환되었을 때 기적(근원적 변화)이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쳤다. 바울도 몸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가 전한 복음이 우리 삶에서 일신우일신 일인칭으로 부활되는 사건의 주체가 될 수 있을 때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종교로 정초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바울의 생명나무를 구성하는 사랑 믿음 소망 중 믿음은 우리 몸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고 우리를 통해 부활의 증거가 되는 일인칭 믿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가족이라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나를 가족의 구성원으로 사랑의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이다. 하나님에 제공한 울타리에 대한 믿음은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공포와 두려움을 밀어내 심리적 안정감을 선물한다. 모든 믿음의 시작은 "울타리"에 대한 삼인칭 믿음에서다. 이 울타리 안에서 자신에게 전달된 사랑과 복음의 의미를 깨달아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이를 통해 자신을 복음의 증거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일인칭 믿음이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제공해준 울타리 안에서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 몸을 통해 예수를 부활시키는 사건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근력은 일인칭 믿음을 통해서 발현된다. 삼인칭 믿음에 갇혀 예수를 자신의 몸을 통해 부활시키지 못한다면 예수를 두 번 장사지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울타리 안에 거하는 삼인칭 믿음은 믿음의 시작이다. 이 이 울타리 안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내 몸의 씨앗으로 심어 생명의 나무로 길러낼 때 일인칭 믿음이 실현된다. 자신 속에 예수를 부활시키는 일인칭 믿음을 실현시켜 각자의 자리에서 지금의 세상을 공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개별 기독교인에게 부과한 책무다.
21세기 교회가 정체된 이유는 삼인칭 믿음을 순종으로 잘못 해석해 삼인칭 믿음으로 무장한 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순종은 삼인칭 믿음을 일인칭 믿음으로 전환시켜 예수를 자신의 삶속에 부활시킴을 통해서다. 자신의 몸 속 예수의 부활을 통해 자신도 변화하고 세상도 변화하게 만듬을 통해서다. 삼인칭 믿음으로 무장해 믿고 기도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원인, 과정, 결과까지 모두 목적에 맞춰 나를 위해 준비해 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삼인칭 믿음이 기복론을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