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민정 의원이 블라인드 채용에 대한 문제를 놓고 경희대 학생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다. 자신은 수원에 있는 경희대학교 분교 출신이고 블라인드 테스트 때문에 실력으로 KBS에 아나운서로 합격했고 이 경력을 통해 지금 국회의원까지 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이에 대해 경희대 학생들은 경희대 분교는 더 이상 분교가 아니고 이원화 캠퍼스로 학생을 선발하는데 분교였다는 것을 굳이 다시 들추는 것은 해교행위라고 주장한다.

학력은 어떤 학교를 나오든지 스스로 공부를 통해서 얻은 자기의 개인적 실력이라면 학벌은 개인적 실력과는 상관없이 졸업장을 준 학교의 명성을 말한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대학교를 안 나오고도 사법시험에 합격할 실력을 보였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학벌이 없이도 학력을 보인 것이다. 지금은 고시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서울법대를 나왔어도 사법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학벌은 있어도 학력은 없는 것이었다. 사법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필사적으로 서울 법대나온 학벌만 옹호할 것이다. 실력이 받혀주지 않으면 누구든 학벌주의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똑 같이 사법시험에 붙었어도 학벌이 없는 사람이 더 실력이 좋은 것으로 판명되면 학벌이 좋은 사람들은 진골, 성골 등의 연합전선을 펴서라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할 것이다.

지금도 고 노무현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 장면이 머리 속에 생생하다. 그 당시 TV에 출현했던 새파랗게 젊은 검사들은 모두 좋은 학벌로 사법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 눈에는 고졸출신이 아무리 사법고시에 패스하고 대통령이 되었어도 자신들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전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접어두고 집단 소피스트가 되어 떠들어대던 무소불의의 광기를 생생히 기억한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들은 대한민국 학벌의 망령들이었고 지금의 망가진 검찰의 장본인들이었다.

이런 검사들의 분위기에 편승해 이화여대 입시에서 정유라는 "돈도 실력"이라는 주장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심지어 유명대학을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유명 일간지 논설의원이란 사람도 조간신문에 대놓고 "학벌도 실력"이라고 시대착오적 발언으로 학벌을 추구하는 학생들의 정서를 옹호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학벌은 실력과 대치점에 서 있다. 학벌을 신봉한다는 것은 그만큼 미래에 대한 자신감 결여와 열등감에 대한 방증이다.

더 큰 문제는 학벌은 혈연, 지연과 더불어 신 신분제의 숨겨진 통로이다. 인지능력을 검증하는 대한민국 현 입시제도에서 좋은 학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잘 외워서 시험에 그대로 토해내야한다. 남들보다 타고난 초보적 인지능력인 암기력은 부모가 유전자로 물려준 것이다. 또한 이런 인지적 유전인자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금전적 지원이 필요하니 부유한 부모 밑에 태어나야 한다. 부모로부터 좋은 머리만 물려받으면 개천에서 용도 나는 시대는 이미 선사시대가 되었다. 최소한 인지능력과 재력을 모두 갖춘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유전자 복권에 두 번은 당첨되어야 한다. 한번도 아니고 최소한 두번의 유전자 복권에 당첨되는 일은 확율적으로 실제 복권당첨보다 힘든 일이다. 두 차례의 유전자 복권에다 강남학군에 집을 가지고 자식을 교육시킬 수 있는 지연까지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부모를 만난다는 것은 또 한번의 신이 뽑아준 복권 세례를 받은 것이다.

물론 이들 학벌 성과에 자신의 노력이라는 요소가 가미되기는 한다.하지만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좋은 학벌은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유전자 복권이라는 행운에 당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신이 뽑아준 엄청난 행운이 작동한 사실을 외면하고 학벌을 마치 자신의 모든 노력으로 취득했다고 주장해가며 학벌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은 염치가 없을 뿐 아니라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행위다. 학벌은 부모의 혈연/재력/지연이 모습을 위장하고 나타난 신분제의 망령이다. 그나마 학벌을 세탁해주는 실력조차도 무시하고 학벌만 가지고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는 것은 신 봉건 신분사회로 돌아가겠다는 주장과 다를 바없다.

학벌이나 실력 중 둘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할까? 사회가 완전히 닫힌 사회여서 100년이 지나도 모든 것이 대물림되는 똑 같은 사회에 살고 있다면 당연히 실력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어서 이 변화에 조금이라도 잘못 대응하면 금방이라도 망할 수 있는 사회라면 학벌은 전혀 무의미할 것이고 이 변화에 실질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실력이 가장 우선 순위에 있을 것이다. 동적으로 변화하는 사회가 우리의 현실이라면 학벌이 밥먹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과거의 성공을 가지고 미래의 성공을 결정하려는 경향은 산업사회에서 통용되던 방식이다. 지금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과거의 성공에 의해서 미래의 성공이 예측될 수 없는 시대이다. 과거의 성공에 의해 미래의 성공이 예측될수록 그 사회는 글로벌의 변화와는 동 떨어진 퇴보하는 사회라는 증거다. 특히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은 아직도 디지털 시대와는 동떨어진 산업사회의 분업과 자동화 방식에 머물고 있다. 학벌주의자들이 고등교육의 시대착오적 오류에 편승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있다면 이들은 큰 사회문제이다. 이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입장이 공격을 받으면 자신들끼리의 학연을 결성해서 우리나라가 디지털 시대로의 진입하는 것을 막는 젊은 수구세력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EBS에서 다큐로 방영되었던 [공부의 배신]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과잠에 드디어 고등학교 이름이 등장했다. 자신의 대학과 여기에 고등학교 이름까지 새긴 잠바를 입어야만 자신이 누구임을 증명하는 인재들이 자신의 학벌 기득권을 지키는데 성공해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끈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없다. 겉으로 보이는 과거의 학벌 스펙은 화려해보여도 이런 계급장을 떼고 자신있게 자신을 이야기할 수 없다면 자신의 정체성은 없는 텅빈 깡통일 뿐이다.

젊은이들이 머리좋고 부유한 부모 밑에 태어난 유전자 복권 덕택에 취득한 학벌을 임대해가며 평생 먹고 살려는 학벌의 렌트 시킹 rent seeking을 벗어나야 우리나라가 다시 디지털 시대의 리더십을 잡을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에는 과거에 이룬 성공인 학벌이 아니라 자신의 공부한 바를 가지고 사회에 실질적 공헌을 했을 때 그 실력을 정당하게 인정받는 기여와 헌신이 요구되는 시대다. 아무리 학벌이 좋아도 사회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존재이유는 없는 것이다. 학벌에 대한 우상화는 좋은 학원 다녀서 토익 만점을 얻었다 하더라도 글로벌에서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실력을 보이는 것과 똑 같다. 변화에 동태적으로 대응해야하는 글로벌 기업이라면 토익 만점 맞았지만 영어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친구를 찾아서 솎아내야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환이 신속하게 이뤄지지 못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부모가 물려준 생득적 인지적 DNA와 경제력에 의해서 결정된 학벌에 의존해서 좋은 고등학교, 대학교 나오고 이런 성공을 죽을 때까지 이용한다는 것은 창조적 파괴를 강조하는 세상의 변화와 꺼꾸로 가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이 자신들과 반대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에도 자신들이 성골, 진골, SKY, 인서울 등 결사체를 구성해서 정치적으로 막아보는 패거리 행동을 한다면 이들은 아무리 젊어도 수구세력이다. 이들의 학벌 중심의 결사체는 부모가 물려준 것들 빼고 자신의 힘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미래를 극복할 수 없다는 열등감이 반영된 것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학벌 기득권에 목메는 어른들과 정치꾼들의 행태를 따라하는 젊은이들을 누군가는 나서서 막아야 한다. 제대로 된 글로벌 회사의 제대로 된 인사담당 임원이라면 자신의 정체성은 없고 학벌에 숨어서 자신을 과시하는 젊은이들을 가장 위험한 시한폭탄으로 규정하고 골라낼 것이다.

성숙한 시민사회를 준거로 생각하면 실력 지상주의(Meritocracy)도 문제다. 실력은 있지만 이 실력으로 새로운 미래의 뉴노멀을 창출하는데 기여하지 못하면 다시 과거 실력에 대한 옹호론자가 된다. 이들은 과거 실력을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사회를 신 신분제 사회로 사회로 더 교묘하게 퇴행시킨다.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유전자 복권에 당첨되지 못한 불행을 타고난 이들의 아픔을 환대해가며 이들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주는 사회가 성숙한 민주적 시민사회다. 자신이 얻어낸 학벌이 온전하게 자신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님을 겸허하게 깨닫고 이 과거와 유전자 복권에서 탈출해서 미래를 위해 몸을 던지는 젊은이들로 채워져야 한다. 어른들이 나서서 이들 진취적 젊은이들의 노고를 더 격려하는 성숙한 대한민국을 기대해본다.

이런 어른들의 격려 덕택에 경희대 학생들의 대자보 제목이 <고민정 의원님, 저희 학생들은 의원님이 부끄럽습니다>에서 <고민정 의원님, 저희가 부끄러웠습니다>라고 바뀌는 날을 기대해 본다.